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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김치에 담긴 사랑

경기한국수필 2021년 신인상 수상작

휜 허리를 어기적거리며 엄마가 밥상을 들고 온다.


휜 허리를 어기적거리며 엄마가 밥상을 들고 온다. 딸은 양은 밥상 위를 휘익 는다. 열 번 스무 번 어봐야 오늘도 김치와 간장, 막장 찌개가 전부다. "나 밥 안 먹어" 딸의 외침에 엄마는 엉거주춤 서 있다. 손녀의 밥투정에 밥상을 먼저 받은 할아버지가 큰소리치신다. "누가 이 밥 가지고 투정을 해. 옛날엔 쌀이 없어서 풀 뜯어다가 강냉이죽도 겨우  먹었는데, 이밥이면 되지 배가 불렀구먼" 할아버지의 호통 소리에 더 혼줄이 날까 젓가락을 들고 밥알을 집어 올린다. 젓가락은 들었지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마는지,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딸의 마음은 아랑곳 않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부지런히 숟가락을 입에 가져간다. 할아버지 상에 올랐던 생선 한 토막은 이내 잔가시와 껍질을 남기고 하얀 속살은 사라졌다. 우리 밥상엔 왜 생선 꼬리라도 없냐고 물어보고 싶으나 물어봤자 다. 이번 폭설에 눈이 무릎까지 내려 오일장 다녀온지도 오래다.  어떨 땐 입맛이 없다며 종종 생선의 흰 속살을 손녀들의 상으로 옮겨주기도 했건만, 오늘 생선 먹기는 글렀다. 젓가락으로 밥알을 깨작거리지만 입에 당기는 건  없고 할아버지의 반상을 흘깃거리다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입맛이 없어?"엄마는 걱정스레 묻는다. "김치밖에 없는데 뭘 먹으라고" 딸은 퉁명스럽게 말한다. 시큰둥하는 딸의 말에 엄마는 밥숟가락을 슬며시 내려놓고는 일어난다. "잠깐만 기다려 봐, 누룽지 가져올게"


백김치가 또르르 지그재그로 말려  숟가락에 내려앉는다.


부엌으로 간 엄마는 냉면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 누룽지를 가져와 딸아이 앞에 놓는다. 언제 꺼내 왔는지 살얼음이 채 녹지 않은 백김치도 함께다. 백김치 한 장을 들더니 손가락으로 주~ 욱 찢어 숟가락을 내밀라는 무언의 눈짓을 보낸다. 엄마의 눈짓에 얼떨결 숟가락을 내미니 백김치가 또르르 지그재그로 말려  숟가락에 내려앉는다. 백김치 옆에 붙은 살얼음이 녹을세라 얼른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간다.

"앗, 차가워!" 입안에 들어온 살얼음이 씹히자 외마디 외치고는 백김치를 오물오물 씹는다.

 

차가운 백김치가 입안에서 아작아작 씹히니 눈에 생기가 돌고 알싸한 시큼함이 입안 가득 퍼져 들어온다. 시큼 짭조름한 백김치의 향은 마치 톡 터지는 귤 알맹이라고 해야 할까? 새콤한 레몬에 소금을 친 맛이라고 해야 할까? 오물오물 쩝쩝 거리며 백김치를 씹는 딸아이를 보던 엄마는 한쪽 손에 들린 백김치를 마저 숟가락에 포개어 놓아준다. 저녁식사를 마친 할아버지는 어느새 뉴스를 보시느라 두 모녀에게는 관심조차 없건만 엄마는 힐긋 할아버지를 한번 쳐다보며 딸에게 백김치가 먹을 만하냐고 묻는다. 딸은 대답 대신 물 누룽지와 백김치를 쩝쩝 거리며 먹는다. 엄마는 밥 먹는 것도 잊었는지 딸의 숟가락에 연거푸 백김치를 찢어 올리느라 바쁘다. 엄마의 바쁜 손은 아랑곳 않고 후루룩 거리며 물 누룽지의 남은 국물까지 들이켜고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엄마, 나 이제 배불러. 그만 먹을래" 그만 먹는다는 딸의 말에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엄마는 밥숟가락을 든다.


눈이 소복이 쌓이는 한겨울이 되고,
그동안 김장독에서 잠자며
적당히 삭힌 백김치는
사춘기 딸의 집 나간 입맛을
되돌려 놓기에 충분했다.


그 날이후 엄마는 가마솥에 바글바글 끓인 구수한 물 누룽지와 살얼음 살살 띄운 백김치를 자주 내어놓았다. 어떤 날은 백김치의 국물을 꼭 짜서 따끈한 쌀밥에 돌돌 말아 소반에 조르륵 올려놓으면 딸아이는 주섬주섬 백김치 쌈밥을 집어 먹었다.

 

냉장고도, 김치냉장고도 없던 시절 가을 고랭지 배추 뜯어다 겨우 내 먹을 김치를 장독마다 그득하게 채운다. 빨간 김장김치 한 단지쯤 사라질 때가 되면 눈이 소복이 쌓이는 한겨울이 되고, 그동안 김장독에서 잠자며 적당히 삭힌 백김치는 사춘기 딸의 집 나간 입맛을 되돌려 놓기에 충분했다. 유난히 변덕스럽고, 밥투정이 심했던 딸이 어려운 시골 살림에 혹시라도 어긋날까 노심초사하며 말없이 감싸 안아 준 엄마의 속 깊은 사랑이었음을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짭조름하니 담백한 백김치 덕분이었을까? 입맛 까다로왔던 딸은 예민한 입맛 탓에 간을 잘 본다. 요리에도 예민함을 발휘하여 요리를 연구하며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내 마음속 엄마는 말이 없이 그저 웃고 계신다.


엄마가 김장 때마다 담갔던 백김치는 당근, 양파, 홍고추, 밤 이것저것 채 썰어 넣은 알록달록한 여느 백김치와는 다르다. 절여진 배추에 채 썰은 무, 마늘, 생강즙만 넣은 담백한 백김치다. 국물까지 알싸하고 시원한 엄마의 백김치가 그리워 솜씨를 발휘해 보지만 김장독에서 잘 숙성된 그 알싸한 맛을 흉내 낼 수가 없다. 소금은 얼마나 넣는지, 마늘, 생강은 어떻게 넣으면 되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내 마음속 엄마는 말이 없이 그저 웃고 계신다. 하얀 줄기 속살 드러낸 백김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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