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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의 고통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존중 받는 출산 이야기

(이 글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쓴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둘째의 13번째 생일입니다.


이제 한창 사춘기를 달리고 있는, 제 방이 동굴인지 아는 깜찍한 아이죠. 둘째는 늘 행복해 보이고, 불편한 게 없는 아이라 사춘기가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사춘기는 모두가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방구석에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갇혀 있기에 제가 한마디 했죠.

엄마: 딸아, 엄마는 네가 동굴 속에 갇힌 줄 알았어.

딸: 왜 그렇게 생각했어?

엄마: 딸이 밥만 먹으면 방 속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니 동굴이지.

딸: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야. 건축가가 될까?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될까? 유튜브로 그런 사람들 보며 수련 중이라고.

엄마: 그래? 사람이 되느라 고생이 많구나!

딸: 그렇지. 그래서 마늘을 먹으러 내려왔다고(딸의 방은 2층).

(빵을 집어 들며)이게 마늘이야. 이걸 먹으니 조금씩 사람이 되고 있어.

엄마: 푸하하하...


나는 딸아이와 대화하다가 그만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이 대화는 곧장 남편에게 전해졌고, 남편도 한바탕 웃었죠. 도대체 둘째의 이런 농담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자칫 싸움이 될 뻔한 사춘기 방콕이 웃음으로 마무리되는 즐거운 기억입니다.


딸아이의 13번째 생일날 지인의 질문(둘째를 몇 시에 낳았어요? 어디서 낳았어요?)으로 난 이 아이의 유쾌함이 출산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오전 10시경, 조산원에서 낳았죠. 조산원이라는 말에 지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부연설명이 더 필요했는데 부연설명을 하다 보니 두 번의 출산 경험이 오버랩되어 고통의 출산 vs 행복한 출산으로 대치되는 현상입니다.


먼저 큰아이의 출산을 풀어볼까 합니다. 누구나 첫 출산은 고통의 연속과 두려움이 가득하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가져오니까요. 저희 부부는 행복한 출산을 꿈꾸며 가족분만을 신청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가족분만은 방이 따로 배정되기 때문에 비용도 두배인 거 아실 거예요. 출산 때 우아하게 들을 찬양 CD(제가 아가페 미션코랄이라는 기독교연합합창단으로 활동할 때 녹음한 찬양입니다)를 준비하고, 깨끗한 배냇저고리를 미리 가방에 넣어두고 출산을 기다렸어요.


하지만 예상을 깨고 양수가 먼저 터지는 바람에 급하게 출산을 하러 가야 했죠. 병원 구급차를 부르고, 출산 때 젖 먹던 힘까지 줘야 한다며 출산 선배들의 말에 따라 미리 준비한 곰탕도 한 그릇 들이키고 응급차에 올랐어요. 병원에 도착하니 자궁문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유도제를 맞고 24시간의 진통을 겪었지만 자궁문은 1cm 열렸어요. 이후 출산하기까지 8cm 이상은 열려야 한다고 했는데 고통은 온 하늘이 찢어지고 저세상으로 가는 줄 알았답니다. 한참 진통을 하고 출산이 다가오자 가족분만실로 옮겨졌고, 찬양 CD를 틀어놓고 아가 만날 생각 하며 참았더랬죠.


정말 고통은 이후였어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이어졌답니다. 우아한 분만은 이미 엿 바꿔 먹은 지 오래고 입에서는 남편 욕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지만 입을 꽉 물어야 했죠. 그나마 가족분만실(1시간 머물렀지만 하루 같은 시간이었음)이라 다른 산모들의 욕지거리는 듣지 않아 감사했어요. 간호사의 다급한 한마디가 들리기 전까진 감사한 마음을 유지하려 애썼답니다.


"아가 머리가 끼었어요"


이 한마디 후 곁에서 손잡아 주던 남편을 밖으로 내보내더라고요. 고통의 소리를 지르면서도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여긴 가족분만실인데, 왜 남편을 내보내'


"여~~~~~~보"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으나 이어지는 고통에

"으악~~~~~"

소리만 크게 나왔죠. 그 이후 남편을 왜 내보냈는지 알게 됐어요. 갑자기 간호사인지, 누군지 모를 분이 내 배 위에 올라타더니 배를 밑으로 쓸어내리기 시작하는데 배를 쓸어내리는지 아가를 내리누르는지 누르는 배가 더 아프게 다가왔죠.(제가 좀 특이한 경험을 한거라 생각해요. 오해 없길 바랍니다.) 고통은 둘째고 걱정이 앞섰어요. 수치스럽고, 아가가 어떻게 될까 더 걱정이었어요.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아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요. 머리가 찌그러진 채로요. 정말 웃픈 상황 말로다 표현이 안되네요. 그리곤 남편을 다시 부르더라고요. 이 감격스러운 순간 탯줄은 아빠가 잘라야 한다고요. 남편은 조금 전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 모른 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탯줄을 잘랐어요. 아가는 4주 이르게 세상에 나왔고, 2.5Kg의 팔뚝만 했어요. 자칫 위험할 뻔했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배를 누른 그 순간이 더 끔찍했어요. 물론 제가 출산의 행위를 다 알진 못하기에 이 또한 감사하게 생각했죠. 둘째를 낳기 전까지는요.


그렇게 36시간이 넘는 진통으로 힘들게 첫아이를 낳고 애지중지 키웠어요. 2년이 지나 둘째를 갖게 되었죠. 사실 첫애 때는 날아다닐 만큼 몸이 가벼웠는데, 둘째 때는 배가 자꾸 아래로 쳐지고 힘들었어요. 누워있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이런 상황에 두 번째 출산을 어떻게 할까 고민이 깊었어요. 첫아이 때의 끔찍한 출산이 떠올랐거든요. 내 고민을 아는 듯 그때 마침 첫아이를 행복하게 출산했다는 지인의 권유로 조산원을 알게 되었어요. 남편은 조산원이라는 말에 한가득 걱정을 끌어안았죠.


"당신 갑상선 수치도 안 좋은데 위험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난 동의가 안돼."


그도 그럴 것이 조산원은 낡은 빌딩 건물 구석에 있었어요. 건물을 방문한 남편은 더 걱정을 하기 시작했지만, 저는 따뜻한 조산사의 말에 마음이 편해졌어요. 제가 찾은 김옥진 조산사는 우리나라에서도 둘째라면 서러울 거꾸로 아가 출산의 대가 시더라고요. 아가가 거꾸로, 즉 다리가 아래로 향하고 있으면 머리를 아래로 돌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돌리지 못하면 병원에선 대부분 제왕절개를 한답니다. 하지만 이 선생님은 머리가 아래로 내려오도록 유도하는 기술을 갖고 계셔서 전국에서 거꾸로 임산부들이 방문을 하더라고요. 선생님의 말은 참 편안했고, 안심이 됐어요. 저는 조산원에서 출산하기로 결심했죠. 물론 위험하지 않게 병원 진단은 꾸준히 받았답니다.


드디어 13년 전 오늘 8시 무렵부터 갑자기 배가 살살 아파오더니 찌르던 가진통은 20분에서 10분으로 훌쩍 뛰어넘었어요. 남편에게 예사롭지 않다며 준비해 둔 곰국은 쳐다도 안 보고 가방부터 챙겼죠. 그리곤 큰아이를 데리고 차에 올랐어요. 조산원이 15분 거리(그 당시 안산, 지금은 찾아보니 선생님이 의왕으로 조산원을 옮기셨더라고요)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조산원에 도착하니 8시 30분.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금방이라도 아가가 쏟아져 나올 듯 겁이 났어요.


조산사이신 김옥진 선생님은 남편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출산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계셨어요. 이후 저는 조산사의 말에 따라 심호흡과 힘을 주며 2시간 후 출산했어요. 남편은 저의 머리맡에서 힘을 받아 주었고, 함께 호흡을 했죠. 큰 아이는 짐볼을 가지고 놀며 선생님이 가끔, "이제 곧 동생 나올 거야. 우리 동생 맞을 파티하는 거야" 하며 큰아이에게도 말을 건네는 여유를 갖고 계셨어요. 신기한 건 아가의 머리가 살짝 걸렸다고 말씀하시더니 심호흡과 배에 힘주는 것, 남편이 저를 받치고 있는 거, 선생님이 구호에 맞춰 머리를 살짝 돌리는 일이 합이 되어 둘째는 시원하게 배변하듯 수욱~ 세상으로 나왔어요. 3.4Kg으로 건강하게요.


그런데 세상에 나온 아가가 울지를 않더라고요. 큰아이는 엉덩이 찰싹 때리며 울리던 간호사가 생각났는데 선생님은 가만히 제 곁에 핏덩이 아가를 뉘어 주시는 거예요.


"선생님! 왜 아가가 울지 않아요?"

"아가는 건강해요. 숨도 잘 쉬고 그러니 울 일이 없지요"


아~~~~ 그때의 감격이 다시 울컥하네요. 전 모든 아가들이 세상에 나오면 울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울지 않는 아가는 쌔근쌔근 숨을 쉬며 아직 자르지 않은 탯줄과 연결되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마치 "엄마, 만나서 반가워요. 여기가 어디예요?" 하고 묻는 것 처럼요.


잠시 그렇게 아가와 저는 탯줄과 연결되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죠. 그 사이 선생님은 뒤처리를 해 주셨고 남편은 얼떨떨하니 탯줄을 잘랐어요. 아가의 몸에 묻은 양수와 피를 닦아주고 간단히 목욕을 시켜주시더라고요. 그리곤 건강을위해 배냇저고리를 바로 입히지 않고 자연 풍욕을 했어요.

자연 풍욕은 프랑스 로브리 씨가 창안한 나체 요법을 일본의 니시 가쯔쪼오 선생이 자연의학 체계로 재구성한 것으로 아토피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함. <굿바이 아토피 87쪽> 최민희 지음


아가와 합이 되어 모유 먹는 법도 다시금 실습해 보았는데, 모유수유 자세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신기할 정도로 편한 자세를 알려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맛있게 미역국 두 대접을 먹고 걸어서 퇴원했답니다. 그날 오후에 바로요. 더 있겠다고, 괜찮냐고 하니 산모도 아가도 건강하니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보양식 먹고 나면 몸 회복 바로 될 거라면서요.


조산원에서 출산한 저의 경험이 10년이 넘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다, 행복했다 되뇌고 있답니다. 병원을 탓하고 싶진 않지만 행복한 출산을 위한 연구는 필요한 것 같아요. 병원 어쩌고 저쩌고 하시겠지만 큰아이 출산한 병원은 경기권에서도 자연분만으로 알아주는 곳이랍니다. 두 아이 모두 머리가 걸리기도 했고요. 물론 둘째 출산 때는 첫째와 다르다는 건 압니다. 그렇더라도 저의 지인은 첫아이를 순풍 나았으니 제 믿음은 이해하시겠죠.


출산의 경험이 남달라서 인지 모르지만 둘째는 피부도, 몸도 건강합니다. 생각도 자유로운 편이고 문제 상황도 빨리 받아들이는 편이랍니다. 예술적 감성도 다르고요. 지금은 사춘기라 조금 까칠 하기는 하지만요.


딸아! 네가 아빠, 엄마에게 와줘서 고마워.

생일 축하해.

네가 좋아하는 떡볶음 저녁에 맛있게 먹자.

딸아이 2살때 200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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