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연습장을 하나 가지고 왔었다.
몇 년 전에 그림연습을 하려고 다이소에서 산 무지 스프링노트다. 어릴 때 연습장에 낙서인 듯 그림인 듯 끄적거리던 것을 떠올리며 부담 없이 쓰려고 샀던 연습장이다. 약 100매 정도 되는데 그동안 딱 한 페이지 그리고 말았다.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색연필을 골라 색깔을 칠하는 일에 열중하던 어린 시절의 즐거움이 결국 미술학원에 가고 싶다는 말조차 해보지 못하고 끝나버린 것이 아쉬워서 크고 나서도 그림도구들을 사곤 했다.
문구점에 가면 괜히 스케치북, 크로키북, 다양한 크기의 드로잉북들을 한 권씩 산다. 물감, 팔레트, 붓, 전문가용 색연필, 마커와 펜 등도 가끔 사본다. 디지털 드로잉도 해야하니 아이패드도 샀다.
혼자서 그림을 그려보려니 막막해서 최근 몇 년간은 짧은 드로잉 강좌 몇 개를 수강하기도 했다. 강의들을 들으면서 사실은 평생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 지조차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있었던 미술시간은 평가의 시간이지 배움의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꿈을 꿔보기도 전에 접었던 그림 그리기에 대한 미련은 각종 그림도구들을 사모으고 강좌에 돈을 지불하며 해소해보려 했지만, 문득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한 건 꼭 형편 때문만은 아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나를 매 순간 발견하기 때문이다.
연습장 100매를 다 채운 건 4살 딸아이였다. 내가 있는 캄보디아에 두어 달 지내러 오면서 아이는 스케치북 한 권을 가지고 왔다. 커다랗게 찌그러진 원을 그린 후 점 두 개를 찍고 작은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면 얼굴인,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그림들로 아이는 스케치북 한 권을 며칠 만에 다 써버렸다. 그래서 몇 년간 묵혀두다 여기까지 가져와서 단 한 페이지를 그리고 만 내 연습장을 아이의 손에 쥐어준 것이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이가 공책을 다 써버렸다며 들고 왔다. 성실히(?) 똑같은 그림으로 꽉 채운 연습장 한 권을 받아 들고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이 연습장 한 권을 채우기가 이렇게 쉬운 거구나 싶어서 마음 한편이 복잡해졌다.
가만히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스케치북 한 권과 연습장 한 권을 다 채워가는 동안 아이의 그림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제 눈을 그릴 때 점 두 개가 아닌 동그라미 두 개에 점 두 개를 그리고, 없던 코와 콧구멍도 그린다. 입모양이 다양해졌고, 팔다리의 모양도 꽤나 역동적이다. 세모를 그릴 줄 알게 되었고, 동그라미 모양도 안정적이다.
연습장이란 이렇게 써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이란 그냥 이런 것 아니겠는가!
그 후로 아이는 또 하나의 연습장을 소진했지만 이제는 집에 남은 연습장이 없다. 사실 여러 권의 드로잉북이 있지만, 그건 내가 꼭 채워 넣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