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런 글을 쓰더라도
완벽한 순간이라는 말은 완벽한 표현이다. 완벽한 순간은 그야말로 ‘순간‘이고 곧 그 순간은 지나간다. 지금 완벽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글쓰기에 완벽한 순간.
혼자 있고, 주변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고, 적당한 양만큼의 점심 식사를 마쳤고, 장미 무늬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 놓았다. 카페에서 흘러나올 것 같은 적당한 템포의 음악을 적당한 볼륨으로 틀어놓았고, 창 밖의 햇살은 화사하다. 나는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있고, 아직 다른 식구들이 나를 방해하기 전까지는 두어 시간이 남아 있다.
이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대개는 청소와 빨래가 잔뜩 쌓여 있고, 배가 너무 고프거나, 너무 불러서 불쾌하고, 그날따라 너무 피곤해서 꼼짝할 수가 없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거나, 외출을 해야만 하고, 또는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는 같은 시간에 가계부를 정리하느라 마음이 심란해서 글을 쓸 수 없었다.
게다가 마음을 무겁게 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덜컥 입학해 버린 방송대 과정을 따라가느라 귀한 혼자만의 시간을 공부에 바쳐야 한다. 교재들을 주섬주섬 챙겨 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기운차게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 속의 빨래나 아직은 소파 언저리를 뒹굴고 있는 가방과 옷가지들은 잠시 모른 척 하자.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다만 책도 마저 읽고 싶고 오늘까지 그림모임에 제출하기로 한 그림도 그려야 한다. 하지만 이 완벽한 순간에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글을 쓰는 것.
글을 쓸 수 있는 순간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학생 때는 공부를 미뤄두고 공상과 망상 사이를 떠도는 생각들을 글로 옮겨적으며 밤을 새우곤 했었다. 일을 시작한 후부터는 글을 쓰지 못했다.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라든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가”하는 고민의 수렁에 빠져서 모바일게임으로 도망치기 일쑤였다. 일을 쉬고 놀 때에는 정체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환한 대낮에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그리고 할 수 없는 일들 사이를 헤매다 에라 모르겠다, 낮잠이나 잤다. 그러는 동안 삶은 흘러갔다. 이젠 육아를 하느라 글 쓸 시간이 없는 것이다.
게으름을 청산하고 부지런해지기로 마음먹은 건 3년 전부터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게을렀고, 심지어 자라면서 더욱더 게으르기로 마음먹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게으르게 살 수 있는지를 고민했고, 가장 게으른 선택을 하며 살았다. 열심히 살다 보면 번아웃이 오듯, 게으른 사람에게도 비슷한 것이 찾아온다. 너무 누워 있으면 허리가 아픈 법이다.
부지런해지는 것은 당연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부지런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젠 적어도 (누가 뭐 라건) 게으르진 않다고 자부한다. 사실 게으름에 대한 글을 쓰려고 작년부터 구상하고 있는데 아직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게으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언젠가 쓰려고 한다.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조언하기를, 글을 쓰려면 시간을 정해 놓고 쓰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살을 빼려면 적게 먹으라는 것처럼 실천의 영역에서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새벽 시간에는 간신히 일어난다고 해도 도저히 글이 써지지 않았고, 저녁 시간은 이제 나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언제 글을 쓸 수 있을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하루하루 패배감만 쌓여간다.
드디어 완벽한 순간이 왔고,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정을 준다. 그냥 이런 글이라도 말이다. 오늘 같은 날은 정말 흔한 날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