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선택을 바꾸다.
삶이 재미없는 순간이 왔을 때,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몸은 지치고, 일은 지겹고, 새로운 걸 하고 싶은 것은 없는 상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말이다.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지난 학기부터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각오는 했지만 공부해야 할 것이 꽤나 많아서 하루하루 쫓기듯 산다. 매일 계획한 분량만큼 강의를 듣고 복습을 하고, 만만치 않은 과제를 쓰느라 고민하고, 출석수업 일정에 맞추어 수업도 들어야 한다. 현역 대학생 시절에 지금처럼만 공부했으면 분명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라고, 아픈 목과 어깨를 주무르며 중얼거리곤 한다. 이 나이에 영어영문학과 3학년 편입생 신분이라니 좀 난데없는 상황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미 석사학위까지 마쳤고, 영문학이라는 전공이 경력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도 않으니 말이다.
얽히고설킨 내 인생의 실타래를 풀어줄 과거의 순간들을 뒤적뒤적 찾아보니 후회는 많고도 많았다. 스펙과는 거리가 먼 노는 게 제일 좋았던 대학생 시절, 돈은 중요하지 않다 정신승리하며 열정페이로 일하던 시절, 남의 말에 혹해서 가게를 계약해 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금… 아쉬운 것이 많아도 지나고 보니 그럭저럭 나름대로 얻은 것들도 있어서, 그래도 마냥 후회만 남진 않는다. 그때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분명히 어딘가 잘못되어 있었다.
대학전공과 사회경력은 어쩐지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어색하게 입은 듯 어정쩡했다. 아무리 오래 입었어도, 불편한 옷이 편해지지는 않더라. 지금 입고 있는 후디와 청바지처럼 편한 것이 무엇인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 살. 나는 담임 선생님에게 찾아가 이미 선택한 ‘문과'를 ‘이과’로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2학년부터 문과반과 이과반으로 나뉘기 때문에 우선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했다. 선착순 또는 성적순으로 인원수는 조정되었다. 뒤늦게 번복한 내 요구를 선생님은 '특별히' 받아주셨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시초라고, 마흔네 살의 나는 결론 내렸다.
처음에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문과’를 선택했다. 인문학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는 연결되어 있으므로 문이과를 나누는 것은 의미 없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문과적 인간임을 의심해 본 적은 없다. 학창 시절 내내 잘하는 과목은 단연 국어였다. 국어공부를 해본 적은 없다. 새 교과서를 받아 오면 가장 먼저 국어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여 역사나 사회과목처럼 글밥이 많은 교과서들을 차례로 읽었다. 읽을거리가 떨어지면 참고서나 문제집도 읽었다. 예습이 아니라 취미였다. 나는 평소에 뒹굴거리며 백과사전이나 문학전집을 뒤적거리다 가만히 앉아서 잡다한 공상이나 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특별활동도 자연스레 문예반이나 독서반이었다. 그러니 소위 문과 과목을 잘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숫자와 기호들은 글자와 달리 아무리 읽어도 해독이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수학이나 과학을 잘하거나 좋아했을 리도 없다. 그러나 귀가 얇은 나는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과’로 바꿔버렸다. 친한 친구가 '이과'가 전망이 좋다며 같이 하자고 했다. 엄마도 '이과'가 낫다더라고 한마디 거들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이과'로 간다는 분위기도 있었다. 실제로 2학년 우리 반에는 1학년때 반장 부반장이던 애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문과반이냐 이과반이냐는 물론 실제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때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내 마음의 소리를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남의 말에 혹한 것이었고, 스스로를 속인 것이었다. 대학교에 갈 때에도, 직업을 선택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를 한번 속이고 나니 걷잡을 수 없이 방향이 틀어져버렸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제쳐두고 잘하지 못하는 것에 매달리며 살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재미있어 보이는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공부하는 경로는 다양하지만 방송대를 선택했다. 대중강의는 재미는 있지만 흐지부지되기 쉽고, 일반 대학교를 다니는 것은 당연히 무리였다. 적당히 강제력이 있으면서 성취감을 느끼기엔 학교공부 만한 것이 없다. 영어로 영미문학작품을 읽어보는 것이 내 오랜 계획이었기 때문에 국어국문학과와 조금 고민하다가 영어영문학으로 선택했다. 선택의 기준은 단 하나. 내가 재미있는가 아닌가. 이 공부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없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기로 했다.
이제 3학년 2학기를 보내며 방송대 첫 일 년을 마무리하고 있다. 바쁘게 공부를 하면서도 자유로움을 느낀다. 나에게 어울리는 후디와 청바지를 비로소 찾아 입은 것처럼 편안하다. 공부가 나를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훨훨 날아가도록 걸쇠를 풀어주는 장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방송대 공부는 아주 어렵지는 않아도 굉장한 성실함을 요구한다. 성실함이라니, 평생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나는 지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게 공부하고 있다. 억지로 하지 않으니 저절로 성실해진다. 방바닥에 엎드려 교과서를 읽던 때처럼.
앞으로는 공부한 내용들을 리뷰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꾸준히 써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