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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다니는 것들

What's in my bag?

by 수연 Mar 1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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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끄적거리는 20공 노트, 간단한 일정관리를 위한 작은 스케줄러, 여전히 사과가 반짝이는 10년 된 맥북, 립밤과 핸드크림이 들어 있는 손바닥만 한 가죽 파우치, 연필과 볼펜이 들어 있는 작은 가죽 필통, 녹색 카드지갑, 그림 그리기 용 아이패드미니 5세대, 해야지 하고 미뤄놓은 계획 백만 가지, 하지 말아야지 결심하고 지키지 못하는 다짐 천만 가지, 근심과 내려놓음의 줄다리기, 언젠가 글로 써야 할 생각들 오조오억 개 등등.



20공 노트를 좋아한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적어놓고 차례대로 다시 배열해 놓을 수 있다. 다이어리와 스케줄러는 산만한 나를 제자리로 데려다 놓는 매개체다. 내 계획은 너무 많고 자주 바뀐다. 거창한 계획이 며칠이 지나면 쓸모없는 계획이 되어버리고는 또 다른 거창한 계획에 휩쓸려간다. 때로는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이 아직 다이어리에 옮겨지지 않은 채로 많은 날이 흘러가버리고는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날이 반복되면 그해의 다이어리 쓰기를 포기했다. 다음 해에 새 다이어리를 사면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은 그런대로 다시 이어 쓴다. 머릿속에서 더 이상 정리가 되지 않을 때면 뒤죽박죽인 생각들을 지면에 쏟아놓을 시간이 필요하다.



10년 전에는 대학원 논문을 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새로운 노트북을 사지 않으면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과에 불이 들어오는 마지막 세대의 맥북을 질렀다. 맥북은 논문을 쓸 때 애로사항이 많았다. 워드프로세서의 논문 양식과 호환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꽤나 묵직한 녀석을 이리저리 잘도 끌고 다녔다. 논문을 마무리하고 남편과 둘이 싱가포르로 여행을 갔는데, 수정할 것들이 점점 늘어나서 저녁 시간 내내 침대 옆 작은 책상에 앉아 마저 마무리했었다. 몇 번인가 시멘트 바닥에 툭툭 떨어트렸지만 잘도 살아남았다. 몇 군데 찍힌 자국이 있지만 여전히 깨끗하다. 지금도 내 백팩 속엔 10년 전에 산 맥북이 있다. 한때 사진과 영상 편집을 해보겠다며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실행해 본 적도 있지만 포기한 지 오래고, 문서작성과 인터넷만 하는 요즘의 나에겐 여전히 충분하다.



주말이 되면 씨엠립으로 탈출했던 캄보디아 시절에 참새가 방앗간에 들르듯 가는 곳이 있었다. 한국인이 하는 가죽공예상점이었다. 가죽공예에 특별한 조예가 있지는 않다. 물건을 잘 다루지 못하는 나에게 가죽은 관리하기 힘든 아이템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그냥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들어가서 꼭 무언가 하나 사들고 나오곤 했다. 사장 부부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친절함은 부담스럽지 않아서 스몰토크게 약한 나도 이것저것 물어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앙증맞은 조리가 달린 안경 걸이용 스트랩, 손에 쏙 들어오는 녹색 카드지갑, 펜 서너 개를 오밀조밀 넣을 수 있는 필통, 열쇠 주머니가 달린 키링, 커다란 쇼퍼백... 등이 그곳에서 산 물건들이다. 참 남편 지갑 선물도 이곳에서 샀다. 귀국하기 전에 함께 일하던 동료에게 이 가게에서 산 파우치를 선물로 받았다. 이 가죽공방 덕분에 손때가 묻어가는 가죽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가방 속에서 여기저기 긁히고, 물도 쏟고, 립글로스가 새어 나오기도 했지만 그 자국들도 함께 바래져 가는 매력이 있다.



아이패드는 미니 이상은 쓰지 못할 것 같다. 핸드백에 쏙 들어가는데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아이패드라면 미니 말고는 불가능하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린다면 아쉬운 사이즈이긴 하지만 취미용으로는 충분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드로잉 수업을 듣고 스케치북이니, 드로잉용 펜이니, 수채화 물감이니 하는 것들을 사모았다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서 샀다. 디지털 드로잉 강의를 들으며 신생아를 등에 업고 그림을 그리던 날들도 있었다. 한동안 꾸준히 그림을 그렸지만 어쩐지 그릴수록 전혀 실력이 늘지 않는 기분에 흥미가 점점 떨어졌다. 그래도 초기에 그린 것과 비교해 보면 꽤 많이 익숙해지고 그럴듯해진 건 사실이다. 매일 작은 그림 하나씩이라도 그려보자고 다짐하지만 그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내가 매일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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