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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Apr 25. 2022

일하지 않을 권리, '삶'을 더 살기위한 저항





책 '일하지 않을 권리'는 에세이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정희재 작가의 책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떠올리게 하는 책 제목 때문에 에세이일 것이라고 생각해버렸던 것이다. 데이비드 프레인의 '일하지 않을 권리'는 '일'에 대한 깊은 학문적 고찰을 바탕으로 '일 저항'에 참여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진정한 일'에 대한 정의를 찾고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에 물든 현시대의 노동자들에게 근본적이고 거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했어야 했을 일'을 '데이비드 프레인'이 해버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공감하며 읽었던 책이다.



'일'이란 무엇이며, 왜 '일'을 하는가?



우선 중요한 건 이 책에서 말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유대 경전에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고, 그것은 진리로 통용되어 왔다.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말은 여전히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하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이란 앙드레 고르의 견해를 빌려 '정시근무를 하는 유급노동'을 지칭한다. 그러면서 '일'에 대한 수많은 개념들을 여러 학자와 작가들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작가는 일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지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장래희망'이나 '꿈이 뭐냐' 질문을 받아왔는데 이것은 하나같이 무엇이 '되기' 원하느냐는 질문이며, 인정받을 만한 직업, 일자리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게 한다. 직업을 갖는 것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분위기 속에서 '일하지 않는 ' 대한 시선은 어떠한가? 그러나 그런 질문을 받는 동안 우리에게는 ' 일을 하는가' 대한 논의가 빠져 있다. 말하자면 '' 하는 노동자의 '' 대한 논의가 없다.


우리 사회의 한쪽에서는 꾸준히 노동착취에 반대하며 공정한 임금과  나은 조건을 주장하는 그룹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보수적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노동뿐 아니라  바깥에서  풍족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주장은 과한 요구 같아 보인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우리가 진정 '원하는 ' 선택할  없는 구조에 대한 고찰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작가는 일-생활 균형, 우리에게 '워라밸'이라 알려진 개념도 부실한 논의로 치부한다. 워라밸 역시 왜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과 근본적 변화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일을 비판하고 거절하는 상상력을 키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워라밸 같은 개인적 차원의 대응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존수단으로의 '일'을 넘어서는 '일'에 대한 논의도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져 왔다. 예술적 창작활동이나, 지적인 활동, 가사노동이나 돌봄 노동 같은 것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치를 측정하기 어려워서 사회가 인정하는 '일'의 경계 밖에 자리한다. 그렇다면 ‘일’을 거절하고 우리가 본질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인간성을 정의하는 활동’이고,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쓴 폴 라파그르는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바는 게으를 권리가 아니라 인간 역량을 더욱 충분히 인식할 권리’라고 썼다. 창작의 영역에서 일이란 불멸성을 탐색하는 행위이고, 자율적인 활동의 관점에서 일은 관심이 있어서 하는,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이다.


분명 이러한 견해는 실제 우리의 삶과 매우 괴리감이 있다. 실은 우리는 청년시절에 전자의 ‘일’과 후자의 ‘일’을 동일하다고 여겼으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전혀 다른 영역임을 깨달아가곤 한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로 여겨진다. 당장의 생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는 점점 우리가 ‘왜 일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잊어버리고는 ‘일’을 그저 ‘해야 하는 일’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 사회


우리는 언제부터 모두가 9시까지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며 주 5일 혹은 6일을 일해야 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출근하기 싫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왜 출근해야 할까?'는 어째서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저자는 현대 사회가 노동자로 하여금 본인의 진정한 자율성을 허락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진정한 자율성이란 '본인 스스로에게 맞는 기술적, 미적, 사회적인 기준에 일의 효율성, 아름다움, 유용성 등을 정하고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막스 베버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에게 맞는 삶의 방식으로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본성을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사람들이 이제는 '어떻게 일하고 성취할 것인가' 아니라 '어떻게 소비하고 즐길 것인가' 골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시대가 원하는 것은 '도피' '방탕'으로 누리는 즐거움이다. 사람들이 '' 아무런 의심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느라 즐거움을 '소비'하는 것도 당연해진 것이다. 이미 십수  전에 탄생한 "열심히 일한 , 떠나라."라는 카피가 오늘날 더욱 자연스러운 이유다. 옛날엔 열심히 일해서 밥을 먹었지만, 이젠 떠나야만 한다. 내가 직장생활을   너무 스트레스받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에 미리 결제해 놓은 여행 항공권을 생각하며 참았던 기억이 난다. 여행을 하려면 일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초기에는 사람들에게 규율을 따르며 규칙적으로 일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자본주의 역사는 개인이 노동일에 따르는 희생과 서서히 결합해 온 역사"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요즘은 더욱 정교하게 노동자들을 컨트롤하고 있다. 21세기의 고용인은 노동자들에게 심지어 "자기답게 살라"는 주문을 한다는 것이다. 산업화 시대에는 노동자의 성격이나 내면이 어떠한지에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기다움'이 노동자가 갖추어야 할 소양으로 여겨지고 있다. 문제는 모든 '자기다움'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구글로 대표되는 소위 캘리포니아식 이념은 '진취적이며 싹싹하고 열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을 훌륭한 노동자로 정의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성격, 즉 수줍어하고 생각이 많고 예민한 기질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자율적이고 평등한 회사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즐거움을 찾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인, 사회적인, 미적인 기준으로 일하는 것이 허용되는 진정한 자율성이 있는지, 회사가 비용을 삭감해야 하는 순간에 노동자와 상사의 관계가 진정으로 평등한지, 그 일이 우리 자신의 라이프 전반에 걸친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일인지를 반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일'을 해야 한다는 믿음, 어딘가에 '고용'되어야만 한다는 의무감때문에 우리는 평생 '고용가능성'을 키우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여긴다. 자본주의가 강조하는 효율성의 증대로 얻은 이익은 노동자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실업률을 높인다. 치열한 경쟁과 부담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많은 일들 - 봉사활동, 여행, 취미활동 등 - 이 취업을 위한 스펙으로 둔갑한다. 이것이 우리가 평생에 걸쳐해야 하는 '일'인가?



게으른 사람들과 일 저항


'일하지 않을 권리'의 5장부터는 저자가 만난 일에 저항하는 열다섯 사람들의 인터뷰 글을 실었다. 이들은 '저항'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기엔 매우 평범하고 조용한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일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지점, 멈추기로 한 시점을 저자는 '단절점'이라고 부른다. 단절점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도 스스로의 본질을 뚜렷이 성찰하기 시작하는, 말하자면 '데미안'에서 말하는 '알을 깨고 나오는' 지점이다.


직장을 다닐 때 출퇴근 길에서 이 책을 읽었었는데, 열다섯 명의 이야기들이 모두 너무 공감이 가서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굴뚝같았다(지금은 그만두었지만). 이들이 일을 거부하기까지 거치는 3가지 경로가 있다. 바로 형편없는 일자리, 작은 이상향, 그리고 망가진 몸이다. 그 경로의 끝에서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을까? 이것이 진정 원하는 일인가?' 하는 성찰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 경로는 찾아온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그들은 그 경로도 일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 같다. 다만 이 책에 소개된 면담자들은 뚜렷하게 '일을 통해 원하는 삶'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사회복지사로 일했던 래리의 이야기는 그동안 내가 고민했던 지점과 거의 비슷했다. 의미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의 본질과 의미를 강화시키는 데에 내 경험과 능력이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기분 말이다.

또 흥미로웠던 부분은 많은 수의 면담자들이 '사교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즐기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일터에서는 움츠러들고 억눌리는 기분을 느끼며 '사교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교성은 오히려 일할 때 장점이 되는 부분이지만, 그들은 사교성을 일의 유용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목적 없는 관계'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들은 유급노동시간을 최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 대단한 활동이나 취미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쫓기는 기분이 전혀 없이' 살아가기를 원할 뿐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는 이유는 '반노동'적인 태도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무언가  하고 싶다' 열망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교육을 통해 습득한 다양한 감각과 경험들은 '' 시작한  발휘할 기회가 거의 없다. 각자가 갖고 있는 창조성과 다양성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하지 않고 혹은 최소한으로 일하면서 어떻게 '생계' 이어갈  있을까? 그들이 택한   하나는 소비 절감이다.   쓰며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달갑지 않은' 절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벤의 경우 '거지 같은 기분'으로 퇴근하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포장음식을  먹고,  포장음식을 사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악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 순환을 끊고 나면 직접 요리할  있는 여유가 생기고, 포장음식 소비를 줄여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에게 고소비적인 생활을 권장하고, 그런 삶은 마치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규범처럼 여겨진다. 여유롭고 느린 삶, 직접 만들고 필요한 만큼만 일하는 삶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원하는 ‘일’을 하기


'일하지 않을 권리'에서 저자는 누구든 '원하는 '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앙드레 고르의 말처럼 자유롭게 자율적인 자기 계발 시간을 허용하면서 스스로 노동시간을 어느 정도로 할지,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토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워라밸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일에 적응하는  다른 형태가 아니라 이는 정치적인 문제로, 정치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을 대하는 태도가 건강, 가족, 환경, 성평등, 개인의 자율성, 그리고 중요한 재미를 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일 저항'은 이러한 모든 개념에 대한 재정비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일'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일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치 있는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이분법적인 오류를 없애야 한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왜 늘 충분하지도 않거니와 착취적이고 환경적으로 해로운 일에 굴종해야 얻을 수 있는가? 우리는 왜 우리의 소득과 권리와 소속감을 채울 수 있는 다른 방법들에 대해 정치적인 토론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일하지 않을 권리' 여러 분야에서 사회비판적인 책들의 핵심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환경과 기후변화, 빈곤과 국제개발협력, 여성운동 등에 대한 책들을 읽어왔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적인 해결법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는 동일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  유급노동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인  아닐까? 사람들은 환경문제, 빈곤문제 등을 이야기하면 우리도 '먹고살려면' 어쩔  없다는 식의 태도를 자주 비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일' 대신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들을 특이한 사람들인 양 '00족'이라 이름 붙여 부르지만,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다. 모두가 '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 자율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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