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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Apr 26. 2022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와 100년후의 여성들.



자기만의 , 버지니아 울프


어느  , 자기만의 방을 읽었다. 도입부가   읽혀서 읽다가 말기를 반복했었는데, 이야기의 가닥이 잡힌 후로는 빨려 들어가듯이 읽었다.


1928년의 버지니아 울프 강연을 그대로 지금 서울의 어느 강당에서 듣는다 해도, 여전히 마음을 울릴  같다.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의 강연문을 옮긴 것으로 강의 주제는 '여성과 소설'이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의 정체성을 갖고, 여성이 되어, 여성의 소설을 쓰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임을 잊고, 여성이면서도 남성성과 결합하여, 소설이든 무엇이든 쓰라고 말한다. 그것을 위해 여성들이 가져야  것은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수입' 자기만의 방이다. 책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길고  여정을 시작한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글쓰기에 미치는 영향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이 역사적으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존재였기 때문에 지적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격양과 분노를 덜어낸 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의 마음으로 글을 썼던 여성작가들이 있었다는 것(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을, 여성들이 남성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울프는 100년 후를 기다린다고, 가난과 억압에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없어 스스로를 내던졌던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말하며 강연을 끝맺는다.


 책을 읽고 나니 그동안  자신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글을 쓰지 못했고, 혹은 썼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체성을 스스로 쌓아가기 시작했다. 20 혹은 30대의 여성, 기혼여성, 해외에서 정체불명의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여성, 특정한 환경에서 자란 여성, 어떤 특성을 좋아하는 여성...... 등등 수많은 정체성들이 나의 글을 가로막았다.  속에 담백한 내가 아닌 정체성이라 믿고 있는 껍데기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불특정 다수의 읽는 이들을 의식해서 단어를 바꾸고, 어투를 바꾸고, 때로는 생각도 바꾸었다.


'온전한 나, 온전한 실재'는 나의 오랜 주제이기도 하다. 나를 나이지 않게 하는 모든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엄격한 규율, 사회적 관습, 직함과 직무...... 그런 것들에 떠밀려서 나도 모르게 사회성 멘트를 익히고 마음에 없는 미소를 짓게 될까 봐 두려웠다. 지위와 권한과 규율과 관습으로 부당하게 개인이 희생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속에 속하고 싶어 하고 또 인정받고도 싶어 했다. 그러니 글쓰기는 점점 부자연스러워지기만 했다.




그리고 100 후의 여성들


책에서 특히 감탄했던 것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융합을 말하는 대목이었다. "여성이 어떤 고충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정당하더라도 어떤 대의를 탄원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여성으로서 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라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울프는 '제인 에어'를 쓴 샬롯 브론테를 비판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페미니즘의 위협은 아마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바라보는 극명히 다른 시선이 그러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즘의 역사에서도 상징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가부장적인 사회에 비판의 목소리를 주저하지 않았으면서도 벌써 1928년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이 또 다른 편을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한 페미니스트이고, 그 기준에서는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이든 뭐든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 식으로 말하면, 여성이 남성처럼 되려는 것도, 혹은 여성성만을 강조하는 것도, 또 남성이 우월성에 기대려는 것도 아닌 각자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어 상대방을 온전한 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도 있겠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그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없이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누군가 있는 그대로 인정해줄 수 있다면, 누구라도 자기 자신이 되어 어떤 글이라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많은 여성들이 글을 쓴다. 그들은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글을 쓰고 있을까? 나는 그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분명 그녀들은 돌아와 있다. 여성이 아닌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여성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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