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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Apr 24. 2022

80일간의 세계일주, 그들이 여행을 떠난 이유.



80일간의 세계일주,  베른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작품은 책으로 읽기 전에 1956년작 영화로 본 적이 있었다. 3시간 남짓 걸리는 길고도 지루한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럽여행을 가던 비행기 안에서 긴 시간을 때울만한 긴 영화를 찾아 선택한 영화였다. 영화는 내가 느끼기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장면들이 많았다. 20세기 초반 유럽의 백인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 대한 편견을 학습하고 싶다면 효과적인 시청각 자료라고 생각된다.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제목은 어린 시절부터 만화영화 제목으로 쓰이기도 하고 '세계일주'라는 환상적인 단어 때문에 아주 오래전부터 꼭 한번 책으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한참 후에나 책으로 읽게 되었다.


20세기의 영화는 재미있게 보지 못했지만 19세기 쥘 베른의 책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영화에서 느껴졌던 편견은 오히려 한세대 전의 쥘 베른의 글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쥘 베른은 오히려 제3자의 눈으로 편견 없이 그 시대 세계 곳곳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었는데, 기계 같은 포그 씨의 성격처럼 함부로 상상하거나 추론하지 않고, 감정이입도 거의 하지 않은 문체라서 훨씬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젊잖은 신사가 여행을 떠나는 목적


필리어스 포그 씨는 신사들과의 젊잖은 모임에서, 달아나버린 은행 절도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논쟁의 불씨를 지핀다. 그는 정확하게 계산한 일정표와 함께 '80일이면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다른 신사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포그 씨는 전재산을 걸고 그 명제를 손수 증명해 보이기 위해 돈가방을 들고 당장 여행을 나선다. 이 즉흥적인 여행은 영국 신사들이 매우 신중하게 여기는 '내기'의 위력이다. 참으로 하찮아 보이는 이유지만, 매 순간 발걸음 수와 정확한 시각을 계산하며 생활하는 포그 씨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포그 씨가 80일간의 세계일주를 하기 위해 챙긴 것은 '셔츠 두 벌', '양말 세 켤레', '비옷과 담요', 그리고 '대륙의 기차 및 증기선 시간표와 여행안내서' 뿐.


언젠가 여행하면서 만났던 언니가 "이스트백 하나 메고 세계여행을 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우리의 여행가방이란 얼마나 복잡한가? 열흘의 여행을 떠날 때에도 커다란 트렁크를 질질 끌고 다니지 않나. 그러나 포그 씨가 챙긴 또 다른 그것 때문에 다른 짐들은 무용해진다. 바로 2만 파운드가 든 돈가방. 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3천만 원이 넘는 금액이고, 그 돈을 들고 80일 간 여행한다고 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금액이다.


포그 씨의 계산은 정확하다. 철도와 여객선의 시간표뿐 아니라 악천후, 역풍, 난파, 열차사고 심지어 열차탈취 사고 같은 각종 사고까지 염두에 둔 계산이다. 과연 포그 씨는 그가 약속한 12월 21일 토요일 저녁 8시 45분까지 리폼 클럽에 도착할 수 있을까?



파스파르투와 픽스 형사, 운명의 여행을 떠나다.


포그 씨의 황당하고 급작스러운 세계일주 때문에 졸지에 여행을 떠나게 된 두 사람이 있다. 바로 파스파르투와 픽스 형사다.


고향인 파리를 떠나 영국에서 열명이 넘는 집의 하인으로 일하다가 드디어 안정된 직장을 잡은 파스파르투는 시계처럼 정확한 데다 런던을 떠나본 적이 없는 포그 씨의 하인으로 취직하게 되어 드디어 여기저기 떠돌지 않아도 되는 것에 매우 기뻐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도 잠시, 포그 씨의 하인이 된 지 약 8시간 만에 길고 긴 세계여행을 떠나게 된다.


80일간의 세계여행에서 포그 씨는 그 '돈가방'의 위력으로 온갖 역경(?)을 헤쳐나가지만, 실상은 파스파르투가 없다면 불가능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는 경솔하고 어설픈 듯이 보이지만 매번 최선을 다해 '포그 씨 대신' 위기에 맞선다. 그러면서도 또 그 경솔함 때문에 포그 씨를 위기에 빠뜨리게도 하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파스파르투는 그저 가여운 하인일 뿐.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다.


픽스 형사는 이 소설에서 긴장감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철두철미하게 시간을 지켜 움직여야 하는 포그 씨의 발목을 잡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며 쫓아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그 씨가 그 은행강도라고 확신하고 파스파루트에게 접근해 정보를 캐내기도 하고, 홍콩에서는 배의 출발시각을 알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등 포그 씨를 체포할 기회를 잡기 위해 애를 쓴다.


문제는 영장이 포그 씨보다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영장을 기다리려면 포그 씨를 며칠 동안 영국령 인도나 홍콩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포그 씨는 위기의 순간마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돈뭉치로 모든 걸 해결했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홍콩을 지나면서는 하루빨리 영국에 도착할 수 있게 하여 체포하겠다는 전략으로 바꿔 오히려 여행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여행을 하려면 파스파르투처럼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여행'다운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은 파스파르투뿐이다. 본의 아니게 파스파르투야말로 다른 나라들을 '관찰'하며 세계일주를 한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포그 씨는 수첩에 열심히 기차나 배의 출발시각, 도착시각 등을 메모하거나 배나 숙소에 앉아 휘슬러 게임이나 하면서 온갖 잔심부름을 파스파르투에게 시키는데, 덕분에 파스파르투는 세계 각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구경할 수 있게 된다.


파스파르투는 각 나라의 축제 현장과 맞닥 뜨리거나 풍물을 구경하면서 인도, 싱가포르, 중국에 영국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일본에 홀로 떨어져서 서커스단의 일원이 되어 공연을 하는가 하면, 도착하는 곳마다 현지의 특이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등 제대로 된 '문화체험'의 기회를 얻게 된다. 물론 그것은 '위험천만'한 사건의 연속이었지만 말이다.


파스파르투는 "참으로 신기하다, 참으로 신기해! 새로운 것들을 보고 싶다면 여행이 쓸데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겠어."라고 감탄한다.


새로운 것을 보는 것, 그것 말고 여행의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여행을 가지 못한 지 벌써 2년도 넘었다. 여행이 일상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포그 씨처럼 갑자기 짐을 꾸려 여행을 가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80일이 아니라 만 하루면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인류가 그동안 여행을 너무 많이 다녔던 탓일까?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80일 만에 세계일주를 할 수 있게 된 후로 더욱 바쁘게 더욱더 많은 곳으로 떠나게 된 결과로, 어쩌면 쥘 베른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상황이 된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읽는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좀 더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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