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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즤즤베베 Jun 16. 2017

그래, 나도 엄마다 - 5

출산의 고통

친정엄마가 6월 6일에 서울로 오기로 했다.

출산을 앞둔 딸이 걱정되어, 혹시나 혼자 있다가 병원 가는 일이 생길까 봐

예정일 며칠 전에 올라온다고 한 것이다.

엄마는 항상 통화로

"건담아, 할머니 6월 6일에 갈 거니까 맞춰서 나와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엄마는 6월 6일 밤에 우리 집에 오셨다.


2017년 6월 7일 새벽 3시 30분

생리통처럼 배가 살살 아팠다.

이상한 기분에 화장실을 가보니

이슬이 비췄다.

아.. 건담이가 드디어 나올 준비를 하는 것인가?

자고 있는 남편이 아닌

엄마를 깨웠다.

"엄마. 나 이슬 비췄어"

화들짝 놀란 엄마는

"그래? 병원 가자!"라고 하셨다.

병원에서는 예전에 교육하기를,

진통이 5분 간격으로 오면 오라고 했기 때문에

우선 분만실로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가 진통 간격이 5분 사이로 되면 오라고 했다.


나는 엄마 옆에 누워 배를 움켜쥐었다.

배가 아팠다가 안 아팠다가

반복적으로 계속됐다.

가진통이 시작된 것이다.


남편은 혹시 몰라 회사에 이야길 하고

휴가를 냈다.

나는 하루 종일 누워 가진통을 겪었다.

엄마는 마트가 문이 열기를 기다렸다가

달려 나가 소고기와 목살 등을 사 와서

나를 먹였다.

먹어야 힘쓴다며....


진통이 없을 땐 아무렇지 않게 밥까지 맛있게 먹었다가

진통이 시작되면 다시 침대에 누워 끙끙거렸다.


그렇게 7일 하루를 보냈다.


2017년 6월 8일 새벽 4시

미친 듯이 배가 아팠다.

예사롭지 않았다.

진통 어플로 체크해보니 진통 간격이 10분 내외였다.

허리도 아프가 시작했다.

엄마가 대신 분만실에 전화를 걸었다.

병원에서는 지금 오라고 했다.


겨우겨우 옷을 갈아입고

자는 남편을 깨워 병원으로 향했다.

향하는 도중에도 진통은 계속되었다.


새벽 5시 30분.

분만실에 도착했다.

가족분만실이어서 엄마와 남편이 모두 함께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태동과 진통을 동시에 체크하기 시작했다.

진통은 5분 간격으로 줄었고,

태동도 점차 약해져 갔다.


자궁문은 2센티 열려 있었다.

서서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진통 강도는 점점 강해졌다.

하반신이 분리되는 듯했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무통주사를 놔달라고 했다.

난 정말 신세계를 경험했다.

무통주사가 없었다면 그 긴 진통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무통주사를 맞고 나니 아무런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엄마랑 웃으며 이야길 나눴다.

좀 전까지만 해도 죽는다고 울었던 내가 웃으며 이야길 하고 있다.

나 자신이 돌아이 같았다.


분만실 선생님이 출산 준비를 하셨다.

관장을 하고, 제모를 하고, 내진을 하셨다.

점점 실감이 났다.


2시간 동안 무통으로 있다가

이제는 힘을 써야 할 때라며

무통주사를 닫아 버리셨다.


힘을 주라 신다.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이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직은 고통이 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근데 시간이 갈수록 진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것 같다며

밖에 있던 남편을 불렀다.

근데 이 남편이란 사람이

같이 힘을 줘야 하는데 한 손으로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는 거다.

NBA 결승전이라나 뭐라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우리나라 국대 경기를 보고 있어도 욕먹을 판에

미국 경기가 뭐가 중요하다고 지금 그걸 보고 있냐고!!!

화딱지가 나서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보고 있던 분만실 선생님이

"에고, 남편은 안 되겠네. 친정엄마 들어오세요"


그래서 남편은 쫓겨나고 엄마가 들어와서

함께 힘을 주었다.


열심히 힘을 주다가 갑자기,

아까 동영상 보던 남편의 모습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에이씨!!!!"라고 했다.

분만실 선생님은 내가 힘을 못줘서 스스로 화가 났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얼마나 힘을 줬을까....

분명히 옆에 있던 엄마가 어느샌가 나가고 없었다.

엄마가 언제 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내가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뭔가 다 끝나가는 느낌이었지만

나의 진통은 끝나지 않았다.


순간 아담과 하와를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따지고 싶었다.

"야, 선악과는 왜 먹어서 내가 이런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냐?!!!"

눈앞에 있다면 머리채를 휘어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와 네 이년!!!!"


의사 선생님이 자리를 잡고 앉아

회음부를 절개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아무런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냥 얼른 힘을 주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뿐.

내가 힘을 못줘서 아기 머리가 끼어 있다고 하니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어 힘을 주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을까?

갑자기 몸속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


"응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미친 듯이 펑펑 울었다.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거.

아이가 제대로 나왔다는 거.

모든 것이 감격의 순간이었고,

감사의 연속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엄마도 밖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내가 우는 소리를 듣고 우셨다고 한다.

"아.. 내 딸이 살았구나...."

친정엄마는 손자보다는 딸부터 챙기다더니

울 엄마도 그랬나 보다.


아이를 힘들게 낳고 보니

엄마가 생각났고,

엄마가 내 옆에 있다는 게 감사했다.

그리고 엄마한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 낳은 지 9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날의 일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또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다가도

아기가 나를 보고 웃으면

그런 생각은 또 사라진다.

하지만 둘째는 없다.

건담이만 열심히 잘 키워 보려고 한다.


앞으로 이 아이와 어떤 추억을 만들어 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것처럼.

그런 엄마가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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