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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창숙 Nov 08. 2021

'라파엘의 집' 천사들

살아온 날의 단상

   '라파엘의 집'


1. 하늘로 올라간 천사


 문정동에는 '라파엘의 집'이 있었다. 남자 형제들만 계시는 곳으로 몸이 불편하고 가족이 없는 형제님들이 계시는 곳으로 가톨릭 재단으로 수녀님들 운영하고  계셨다.


 내 나이 33살 때 가톨릭 세례를 받고 얼마 안 있다가 단체에 들어간 곳이 레지오라는 단체였다. 지금부터 37년 전의 일이다. 교리를 배웠지만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좀 더 잘 살고 싶은 생각에 회합에 참여하고 빨래봉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 그곳에 갈 때는 조금은 두려웠다. 어떤 곳인지 얘기를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듣는 것 하고 직접 가서 보고 일하는 것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빨래는 얼마나 많은지, 손으로 다 빨 수 있는지, 중간에 하다가 못한다고 할 수 있는지...


  그러나 '라파엘의 집' 빨래봉사는 봄을 지나, 여름을 지나, 가을을 지나, 겨울까지 이어졌다. 리는 '라파엘의 집'에 갈 땐  아무리 더운 여름이어도 긴바지와 긴 상의, 그리고  양말을 꼭 신었다. 또한 그곳에선 우리끼리라도 가능한 큰소리로 말을 하지 않았다. 현관 옆의 세탁실과 빨래를 널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외에는 어느 곳도 지나가지 않았다. 또한 일이 끝나도 차 한잔도 마시지 않고 '아니 다녀간 듯'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행여 지나가다 형제님을 만날 경우는 깊게 고개를 숙여 그분께 경의를 표했다. 그분들은 모두 천사의 눈을 하고 계셨고, 날개를 달지 않은 천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곳엔 세탁기가 없었다. 그러나 세탁기가 있었다 해도 똥이 들어있거나 묻어 있는 팬티와 바지는 빨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지금처럼 "대형 1회용 기저귀가 있었다면 아마도 일일이 손빨래하는 번거로움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이 글을 쓰면서 들었다.


  나는 내 두 아이를 키울 때 모든 빨래들을 손빨래다. 손빨래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이를 키울 때 내겐 세탁기가 없었던 것이다. 오줌 싼 천 기저귀와 똥을 싼 천기저귀를 분리해서 대야에 담가 놓고 손빨래를 했다. 이 기저귀들은 방에 못을 박아 줄을 걸어 놓고 기저귀들을 널었고, 뒷 다용도실이라  할 수 있는 연탄 때는 곳에도 벽과 벽 사이에 못을 박아 줄을 걸고 날마다 기저귀를 널었다. 더군다나 연년생인 두 아이는 함께 기저귀를 찼다.


  그때 내가 가장 곤욕스러웠던 기억은 장마 때 기저귀가 마르지 않을 때였고, 아이가 설사를 해서 더 이상 채울 기저귀가 없을 때였다. 이런 시절을 겪고 나니 요즘처럼 1회용 기저귀를 쌓아 놓고 아기들을 키우는 젊은 엄마들과  전화 한 통화로 현관 앞까지 기저귀를 배달해 주는 요즘 시대가 정말 부럽기만 다.


 그리고 두 아이를 다 키우고 나는 아파트로 이사 가서는 제일 먼저 산 것이 세탁기였다. 이 세탁기로 집안 살림에서  많이 벗어 날 수 있었다. 세탁기는 책을 읽을 시간을 내게 주었고,  아이들과도 나들이  시간을 주었고, 빨래봉사를 할 시간도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고마워하는 전자제품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세탁기를 꼽고, 세탁기를 개발하신 분께 나는 큰 절을 하고 을 정도다.


 이렇게 집에서는 세탁기로 빨래를 하고, 이불 빨래는 욕조에 넣어 두면 남편이 밟아 널어주곤 해서 손빨래는 거의 하지 않는 때였다. 그러나 봉사는 빨래봉사였다. 


 우리 팀은 '라파엘의 집' 빨래봉사를 일주일에 한 번씩  한 번에 4명씩 조를 짜서 빨래를 하러 갔다. 빨래하는 세탁장은 전부 타일로 되어 있었고, 빨래를 하기 위해 무릎까지 오는 장화와 발밑까지 오는 비닐 앞치마와  마스크를  쓰고  팔꿈치까지 오는 비닐장갑을 끼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갈 때마다 빨래는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다. 우리 팀 말고도 봉사하는 팀이 었지만 갈 때마다 빨래는 노적봉처럼 쌓여 있었다.


 1단계에서는 빨래를  큰 빨래통에서 털어야 했다. 팬티나 바지에 들어 있는 똥이 다른 빨래에 섞이면 큰 낭패였기에 일일이 털어내고 빨래를 주물러야 했다. 그런데 여러 번이나 털었는데도 빨랫감 속에 있는 똥을 못 털고 다른 빨래와 함께 빨게 되면 그 물을 다 버려야 하는 경가 몇 번 있었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빨랫감을 하나씩 들쳐보는 일이 빨래의 시작이었다.


  수녀님께선  똥이 들어 있는 팬티는 따로 모아 두셨지만, 형제님들은 똥 팬티가 부끄러워서인지  빨랫감 속에 몇 번이나 숨겨 놓아 우리를 난감하게 했다. 그때 우리 팀의 봉사자들은 모두 30대였고 단장님만 40대 초반이셨다.


  어느 날부터인가 단장님께서는 우리 보고 잠시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시곤 먼저 빨래하는 곳으로 들어가셨다가  한참있다 나오시곤 하였다. 우리는 밖에서 기다렸다가  단장님이 나오시면 그때부터 빨래를 시작하였다. 단장님께서 왜 먼저 세탁장에 들어가시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런 일은 매번 반복이 되었다. 날도 똑같았다.

"조금 있다 들어오세요." 하시며 빨래하는 곳으로 먼저 들어가셨고 우리는 밖에서 조그만 소리로 소곤거렸다.


"단장님 먼저 들어가셔서 뭐를 하시지? 혹시 맛있는 거 혼자 드시는 거 아냐?"

 단원 중의 한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농담을 했다. 똥냄새가 풀풀 나는 세탁장에서라도 맛있는 것을 드시라는 마음에서, 그러나 그럴리는 없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라고 나는 대답을 해주었다


  렇게 우리끼리 소곤리다가 오늘따라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단장님을 기다리며,  나는 "내가 들어가 볼게." 하고 문을 열어 보았, 평상시에는 잠겨 있던 문이 단장님께서 문을 못 잠그셨나 보다. 문이 열리고 단장님께선 변기 안에다 팬티에 있는 똥을 일일이 털어내고 계셨다. 단장님은 아직 젊은 우리들이 애들 똥도 아닌 어른의 똥 팬티나 바지를 빨래하는 것에 항상 미안해하고 계셨던 것이다. 


  옛 어른들께서 '똥은 촌수를 가린다.'는 말씀을 하신 뜻은  내 아이 똥냄새는 맡아도 남의 아이 똥냄새는 못 맡는다는 것처럼 똥은 정말 촌수를 따지는 물건이란 뜻이었을게다.


  우리는 순간 놀랐다. 어쩐지 요즘 똥 팬티가 빨랫감에 섞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빨래를 하며 "똥이 덜 나오네. 형제님께서 철이 드셨나 보다." 하며 웃었는데, 똥이 덜 나온 게 아니라 미리 단장님께서  애벌빨래를 하고 계셨던 거였다.


  그리고 그다음  빨래 봉사하러 갈 땐,  내가 제일 먼저 세탁장에 들어가 행여 누가 들어올까 문을 잠갔다. 단장님이 하시던 것처럼 똥 팬티를 변기 안에 털어내고 변기 물로 애벌빨래를 다. 누가 문을 두드려도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다음 주는 함께 갔던 봉사자가 현관에 들어서며 후다닥 신발을 벗고는 세탁장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 봉사자도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우리들은 라파엘의 집 현관만 들어서면 소리 없이 먼저 재빨리 세탁장에 들어가려고 "아, 오늘은 배가 아파서 내가 먼저 화장실을..." 이렇게 멀쩡한 배가 아펐고, 행동 빠른 봉사자는 차에서 내려 우리가 신발을 벗기도 전에  '번개'처럼 달려가 문을 잠갔다. 그 순간은 모두 천사였다.


  세탁장엔 5개로 나뉜 타일로 리 높이로 빨래를 할 수 있는  욕조가 있었고  모든 욕조물을 받아 놓고는, 욕조에 가루세제를 뿌려 놓고 손빨래를 하고, 그 옆 욕조 빨래를 넣으면서 한 사람씩  헹구어  옆 통으로 옮기고, 이렇게 다섯 번째 통까지 헹구면 일반 빨랫감의 빨래가 끝이 났다.


 그러나 똥 팬티나 똥이 묻은 바지들만 모아 빨은 빨래들은 3번째 욕조에서 헹구어도 다 사라지지 않은 냄새들을 제거하기 위해 수녀님께서는 락스를 조금 넣어 헹구어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이렇게 두 종류의 빨래를 다하고 나면 손으로 짜서 큰 통에 담아 옥상까지 가지고 올라가면 되는데 큰 통을 두 명씩 잡고 계단을 올라가는 일은 힘들었다. 그리고 몇 줄씩이나 길게 걸어놓은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빨래집게로 집어 긴 장대를 받쳐 놓으면 그날의 빨래는 끝이 나는 거였다.


 우리들은 빨래를 다 끝내고 옥상에 올라온 것이  마치 에베레스트산이라도 올라온 것 마냥 성취감에 기지개를 켜고, 널어 놓은 옷가지들을 보며 좋아라 했다.


 짜지 못한 옷에선 물이 뚝뚝 흐르고

겨울엔 옷에서 고드름 열리고...


  집에 오는 길은 마음도 가벼웠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힘도 들지 않았다. 그 많은 빨래를, 어찌 보면 더럽고 냄새나는 빨래들을 하고 힘들었을 텐데 오히려 남을 도울 수 있음에 행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이상한 날들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의 봉사처럼 빨래를 하는데 늘 똥을 싸 놓은 기억하는 팬티와 바지가 보이지 않았다. 빨래를 다하고 나오면서 배웅해 주는 수녀님께  내가 물었다.


"수녀님! 그 형제님 똥 팬티가 보이지 않아요?

건강이 좋아지셨나 봐요."


 나는 늘 감사의 말씀을 잊지 않는 수녀님께 힘듦을 가벼운 마음으로 형제님의 안부를 물었다.

 

"그 형제님 지난주에 하늘로 올라가셨어요." 수녀님의 말씀은 무겁게 되돌아왔고, 우리  모두는 전부 얼음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모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똥 팬티를 더 빨아도 되니 더 오래 사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한 형제가 '라파엘의 집' 공동체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오며 누구 한 사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죽음의 쓸쓸함에 하늘을 보며 얼굴도 모르는 한 형제님을 위하여 마음이 하나가 되어 기도를 드렸다.


"고단한 삶을 살아온 당신의 자녀를 돌아보시어 당신 품에 그를 맡깁니다.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하고.


  그 형제님은 살아서는 힘들고, 외롭고, 가장 비천하게 살았겠지만, 마지막 하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날개가 달려 하늘을 마음껏 날고 하늘에 올라갔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그분은 천사였으니까!


          라파엘로의 '시스틴 마돈나' 성화에서


2. 바짓가랑이 한쪽


   손빨래를 할 때 아이들이 바지를 휙 벗어 젖혀 바짓가랑이 하나가 다른 쪽으로 들어가면, 헹구면서 바짓가랑이를 빼느라 물속에서 물을 넣어 빼곤 하였다. 


  빨래 봉사를 간 이날도 바짓가랑이 한쪽이 안 나와서  물속에 넣고 휘저으며 한쪽을 빼려 하는데 빠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물속에 넣어 한쪽을 빼내려 해도 한쪽 바지가 나오지 않았다. 세탁장 앞을 왔다 갔다 하시던 수녀님께서 보셨나 보다. 녀님께서는  

"그 바지는 한  다리가 없는 형제님 거예요. 지난 주에 오셨어요."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다리 한 쪽이 없으시니 바지 한 쪽도 꿰매여 막혀  었던 거였다. 

눈물이 났다.

잠시 숨을 고르고 정성스레 그 형제님의 바지를 헹구어 널었다.


 그날따라 하늘은 화창했고 빨랫줄에 걸어 놓은 한쪽 바짓가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며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바지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다.

한쪽 바지에서 떨어지는 물은

그 형제님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2021년 11월 6일 금강수목원에서. 사진:빈창숙


..........

 

 나는 그때 봉사라는 이름으로 '라파엘의 집'을 방문했지만,  '라파엘의 집'은 내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이정표를 보여준 곳이었다.  


금강수목원 산길을 걸으며  '라파엘의 집'이 생각이 났다.


하늘로 올라가신 형제님께도

살아계시리라 믿는  형제님께도

이 가을의 정취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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