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중년의 여자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수채화를 정성껏 그린다. 몇 가지의 수다가 오가고 점잖은 웃음소리도 오간다. 여자는 웃지 않는다. 사실 그림을 그리러 문화센터에 가기는 했지만 심드렁하다. 특별히 그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림에 안목을 키우려다 그리러까지 가게 된 것뿐이다. 사람들이 여자를 기웃대지만 이야기에 끼고 싶지 않아 그림에 심취한 척한다. 여자는 웃고 싶지 않다.
겨울이다. 바람이 차다. 땅 군데군데 얼음이 보인다. 여자가 신은 굽 높은 구두가 불안하다. 여자는 천천히 걷는다. 찬 바람에 얼굴이 더 굳는다. 옷깃을 여미고 살살, 걸음마를 처음 배운 아이처럼 걷는다. 뒤를 여자 둘이서 걸어온다. 같이 점심을 먹지 않겠느냐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무시하고 앞만 바라보고 걷는다. 그녀들의 시선을 느껴 더 조심조심 걷는다. 마침내 문화센터와 가깝게 자리 잡은 집 앞에 도착한다.
대문에서부터 언덕이 있는 집이다. 넓고 크다. 색 바랜 잔디 위를 같은 색의 사자가 앉아 있다. 사자? 사자는 갈기를 휘날리며 여자를 반긴다. 높은 구두와 언 땅, 그리고 달려드는 사자까지. 여자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헝클어진 사자 갈기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집 안으로 들어선다. 사자는, 같이 안으로 들어서고자 하지만 남편은 동물은 집안에 들어지 않는다.
남편은 여자를 사랑한다. 언제나 눈이 마주치면 안아준다. 하지만 그런 남편은 바쁘다. 그리고 여자는 그런 포옹이 반갑지 않다. 그냥 이제 덤덤하게 대해줬으면 하는데도 남편은 신혼처럼 다정하다. 남편의 사업은 잘 되고 있고 여자는 심심하다.
심심한 게 아니다. 슬프다. 내내 슬펐다. 그림을 그릴 때부터.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 의심받는 현재가 슬프다. 생각해 보니 남편에게 지금의 집 위치의 땅을 권한 것도,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을 권한 것도 자신이었는데 이제 자신은 한발 뒤로 빠져 문화센터에 그림이나 그리러 다니고 있는 것이 무언가 자신이 할 일을 빼앗긴 기분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현재를 즐기며 살면 되는데 왜 슬픈가.
문득
눈을 떴다. 꿈이었다. 꿈? 뭐 이따위 꿈을 꾸는가. 사자가 나올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꿈을 깨고 나서도 한참 슬펐다. 슬플 일인가. 기쁜 일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된장, 나는 꿈속에서도 일하는 여자이고 싶었던 건가. 일하지 않는다고 존재가치에 대해 부정당하는 느낌에 슬퍼하는 꿈이라니.... 김장 후유증이 만든 헛소리 같은 꿈을 꾸었다고 정의하고 다시 잠들려 낑낑대던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