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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Nov 18. 2023

소설 쓰기의 방향설정

쉽지 않아요

시장에 싼 값이 나를 올려놓았더니 이런저런 연락이 왔다. 싼값에 내놓은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시작을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중 하나, 소설을 쓰고 싶은 청년과의 수업을 시작했다. 청년은 중학교 때부터 썼다는 두꺼운 스프링 노트를 일곱 권 들고 왔다. 할 일이 몹시 많아졌다.


청년이 들고 온 스프링 노트를 열어보니 그 두꺼운 노트의 앞 열 장 정도만 썼을 뿐이었다. 모든 노트가 다 그랬다. 아마도 엄청난 것이 떠올라서 시작은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첫 몇 장만 계속해서 써댔을 것이다. 19세기 오스트리아 근처에 있는 1942년이나 된 오래된 제국의 5대의 이야기를 장편으로 쓰고 싶단다. 그러나 그 긴 이야기의 구상속에 자세한 에피소드도 생각해 본 적 없고, 주제도 정해 본 적 없고, 인물의 구체적인 성격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단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쓰고 있는 소설이라는데 말이다. 가끔은- 잘못된 신념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

 

나는 잘 쓸 수 있다고,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그것을 모두 꺼내 놓은 순간, 세상은 깜짝 놀랄 거라고 기대하며 펜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아무것도 정하지도 않고 무조건 쓰는 거다. 가끔은 천재들이 그렇게 쓰기도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재가 아니므로 아주아주 구체적인 구성을 짜고 시작해도 쓸까 말까다. 그럼에도 그런 절차를 무시한다. 잘못된 노력을 꾸준히 한 것이 안타깝다. 처음 아주 작은 차이의 각이 그 길이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차이가 몹시 커져버린 각도를 본 느낌이다. 이렇게 포인트가 맞지 않는 길을 꾸준히 가는 것도 재주는 재주라는 생각이 깊이 들면서도, 글을 쓰겠다는 사람이 응당 그런 고집이 필요하기도 하겠다고 생각해 본다. 


지금 스물일곱이라니까, 십 년을 넘게 글을 쓴 건데 소설 쓰기의 구상단계 중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여 할 이야기를 확정하지 못하는 첫째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 청년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방향설정을 다시 해주고 가는 길을 재설정해주는 일인 것 같다. 싼값에 나를 팔았어도 내 수업이 싸구려일 수는 없다. 하-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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