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에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얼마 전, 포도 농장에 일이 있을 수도 있다며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던 지인이다. 자신도 일 년여를 기다린 끝에 가게 된 자리라고 했다. 꼭 나도 데려가 달라고 했는데 그 말이 진심인지 다시 물었다. 진심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일 못한다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며, 일 못한다는 소리를 극도로 싫어하여 온몸을 다 바쳐서 일하는 타입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 토요일이 디데이! 하우스 안이라서 후덥지근할 테니 알고 있으라고 한다. 옙, 그럼요 그럼요.
토요일, 7시부터 일을 시작한다는데 주인은 아직 밭에 없고, 나 포함 일꾼만 네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만 생 초짜고 다들 경험이 있는 눈치였다. 나를 소개해준 지인도 3일 차라고 했다. 알아서 척척 물을 끓여 커피를 타서 주길래 마시고 있었더니 한 사람이
7시가 되면 주인이 오든 안 오든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커피만 마시고 있지 말고 일을 하세요.
한다. 움찔해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랬다고 말하니 순을 따라고 했다. 방울토마토나 고추 순을 따듯이 하면 되냐고 물으니 토마토 키우냐고 되물었다. 아마 토마토 농장을 하느냐고 묻는 것 같아서 괜히 얼굴이 붉어지며 집 마당에 조금 키운다고 했더니 아, 화분에 하나? 한다. 심기가 불편해진 나는 괜히 발끈해서는 아니에요. 열 포기예요 했다. (사실은 여덟 포기다.) 그래도 마당밭에서 이것저것 길러보았고 순 따는 거야 늘 하던 일이라서 일 자체가 어렵지 않았다. 둘씩 짝이 되어 옆짝꿍들은 포도덩굴이 잘 자리를 잡을 수 있게 집게로 가지를 잡아주면 우리 둘은 순을 땄다. 더울까 봐 걱정했는데 하우스 천장 위로 투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요한 하우스 안에 정겨운 빗소리가 들리니 괜히 행복해졌다.
9시가 되니 간식타임이란다. 지나가던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합류하여 주인포함 9명이서 빵과 떡을 먹었다. 나는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찾아 먹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간식은 먹질 않아서 예의상 모닝빵하나를 먹었다. 따뜻한 차와 함께 먹으며 빗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몽글몽글 해졌다. 샤인머스캣 농장에 첫 알바를 가서 낭만을 찾고 있는 걸 보니 나는 고생을 덜 한 모양이다.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아서 노래도 흥얼흥얼 따라 부르고 청취자의 사연을 들으며 어머나하며 공감도 하고 순을 따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도시락을 싸 온 사람도 있지만 주인이 그 자리에서 밥을 해서 주었다. 이것저것 푸짐하게도 얻어먹고 있자니 도란도란 이야기도 재밌다. 다 한 동네 사는 사람들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잠시 쉬는데 옆짝꿍들이 우리에게 물었다.
우리보다 어린것 같은데, 두 분은 몇 살이에요?
앗, 굳이 나이를 까야하나? 선배님으로 모시려고 했는데... 하며 당황하고 있는데 대뜸 자신의 생년을 밝힌다. 하하,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었다. 우리 둘이 자신보다 한두 살 위인 것을 알자 갑자기 친절해졌다. 친절한 그녀들과 일을 하고 오후 간식으로 치킨도 먹고 오후 5시, 퇴근시간이 되었다. 이리저리 엉클어져 있던 포도나무 넝쿨들이 가지런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것을 보니 뿌듯했다. 사실 점심 이후로 삭신이 쑤시기 시작했지만 오랜만에 몸을 쓰는 일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거기에다가 바로 받는 머니라니. 오 마이 갓. 아임 붸리 해피!!
점심값과 교통비가 포함되었다는 일당은 무려 십일만 원. 공손하게 현금을 받아 주머니에 넣으니 너무나도 행복했다. 첫 알바 개시일에, 그렇게 덥다는 하우스에서-하느님이 보우하사 봄꽃비가 내려 선선하게 일하게 해 주시고 언니를 깍듯하게 모시는 예의 가득한 동료를 만나서 작업분위기도 좋았다. 하늘은 내 편이다.
당장 이 돈 들고 고깃집으로 갈까 봐 따로 보관하기로 한다. 토요일 하루 알바 뛰어서 언제 꿈을 이룰지 모르겠지만 우선 목적을 가진 꿈통을 만들었으니 채워보자.
우리집 마당밭 샤인머스캣 담당인 남편에게 잘난 척을 하며 훈수를 두려면 아직 샤인머스캣 농장일에 나는 배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