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도장깨기 1
나에게 상대방은 늘 ‘선생님’이었다. 20여년동안 사교육계에서 교사교육과 강의를 담당하였으니 입에 베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영양실(조리실)에서 일을 하면서도 ‘선생님, 이건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 이건 이렇게 하는 것이 맞지요?’했다. 첫 날 일이 끝날 때쯤 왕 선배님이 “언니라고 불러.”라고 했다. 나에게는 언니라는 말이 참 어렵다. 옷가게나 식당에서 “언니~!”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진짜 언니인 줄 착각한 적도 많았다. 요즘에는 호칭이 엉망진창이 되어서 전국에 식당 사장님들은 대부분은 이모이고 고모이며 남편은 오빠고 처음 보는 여자는 언니가 되었지만, 나는 언니라는 말이 참 어렵다. 시누가 다섯인 집에 시집을 와서 형님은 많지만 언니는 없다. 언니소리를 듣기만 했지 해본 적 없어서 참 어려운 말을 이제 많이 하게 생겼다.
갑자기 엄청 많이 생긴 언니들은 나에게 무엇이라도 하나 더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처럼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같은 것을 각자의 방법으로 여러 번에 걸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러나 나는 유능한 사람. 화장실도 없는 포도밭에서도 일해 본 사람으로 정신만 바짝 차리면 내가 못할 것은 없다. 왕언니가 대표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가르치는 일을 했다던데 왜 여기에 왔냐는 거다.
'머리 아픈 일 그만하고, 몸 쓰는 일 하려고요.'
언니들이 와하하 웃었다. 쉰 넘은 지가 언제인데 나는 여기에서 젊고 똑똑하다고 칭찬받는다.
포도밭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 남편은 눈물이 난다고 했다. 조리사로 취직했다고 했을 때 남편은 울지는 않았다. 못 말리겠구나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을 뿐이다. 남편은 자신이 몸을 쓰는 일을 하기 때문에 내가 머리 쓰는 일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병원에서 내가 맡은 일은 세팅이다. 왕언니들이 음식을 만들고 나는 입원환자들에 맞게 식이표를 보며 음식을 세팅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출근해서 재료를 손질하고, 설거지를 하고, 직원들이 식사를 하다 부족한 음식을 채우거나 치우고, 홀에 걸레질을 한다. 남편에게는 ‘세팅’만 한다고 말했다. 믿지 않는 눈치다.
남편은 빵쟁이출신이다. 내가 세팅만 한다고 해도 무엇을 할지 감을 잡은 얼굴이다. 그냥, 오지랖만 떨지 말아라 하며, 되도록 칼도 잡지 말라고 한다. 어차피 칼이 내 차지가 되려면 10년은 걸릴것 같다는 내 말에 이것저것 다 하겠다고 나서지 말라한다.
오늘은 김을 이백장 굽는데 오른손이 익을 것 같았다. 정신도 오락가락 하는 것 같았다. 수능 때만 되면 찹쌀떡을 직접 만드느라 오른손이 익는 것 같았다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 얼굴도 떠올랐다. 방학만 되면 할머니댁에서 한 달은 살았던 것 같다. 나는 밥을 하는 할머니를 옆에서 보는 게 참 좋았다. 솔가지로 불을 붙여 그 위에 작은 장작들을 얹어서 쌀이 포로록 두 번 끓어오르면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을 조금 앞을 빼서 밥 뜸을 들였다. 그 숯불 위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된장찌개 뚝배기를 얹어두면 밥 뜸이 다 들 때쯤 된장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그러면 할머니는 거침없이 뚝배기를 덥석 들어 상 위에 올렸다.
“할머니! 안 뜨거?”
하고 내가 깜짝 놀라 물으면
“뜨거.”
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내가 밥을 해 먹던 때, 내 엄지와 검지에 뚝살이 단단하게 박히는 걸 보게 되었다. 요즘은 여러 가지 조리 기구가 많아서 그런지 여리디 여린 손가락을 가지게 된 나는 김을 겨우 이백장 구웠다고 손이 익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