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랑 놀래

by 벼리

고3 담임을 맡은 첫 달, 3월을 폭풍처럼 지나왔다. 매일 밤 9시까지 이어지는 상담과 업무, 수업 준비.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선 작은 바늘시계가 끊임없이 돌아갔다. 9시 정각. 핸드폰 속 배경화면의 아이가 내 시선을 붙든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차로 5분 거리다. 그 짧은 거리가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집에 들러 아이를 안아주고, 때로는 목욕을 시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곤 했다. 몇 분의 만남이었지만 나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아쉬움이 자리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예전보다 확연히 줄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무겁게 했다.


그날도 나는 9시가 다 되어서야 교무실을 나섰다. 아이는 보통 9시면 잠들기 때문에, 잠들기 전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부랴부랴 교무실을 나섰다. 집 현관문을 여는 순간, 복도 끝에서 달려오는 작은 발소리. 아이는 마치 내 부재를 온몸으로 느꼈다는 듯 달려와 내 다리를 감싸 안았다.


“아빠!”


내 다리를 껴안는 작은 무게가 하루 종일 쌓인 피로를 씻어냈다. 아내는 “이제 자야지. 아빠랑 내일 놀아.” 그러나 아이의 고집은 늘 강하다. 양보하는 쪽은 늘 부모이다. 아이는 작은 승리를 거머쥐고 거실 소파로 달려갔다. 나는 피로에 절었지만 아이의 뒤를 따랐다.


소파에 앉자 아이는 내 핸드폰을 가리켰다. ”노래 들을래“ 동요 재생목록을 열자 아이는 내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스스로 고르겠다며 화면을 이리저리 터치했다. 노래마다 ”나 이거 좋아해!“라고 외치다가도 10초도 안 되어 ”이건 아니야“라며 다음 노래로 넘어갔다. 그 반복되는 과정이 처음에는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어느샌가 나는 아이의 선곡 과정에 빠져들었다.


앨범 표지를 보고 노래를 고르는 아이의 기준을 알 수 없었다. 어떤 기준으로 고르는지, 어떤 노래가 마음에 드는지.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아이의 얼굴은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소파 위에서 뛰어오르기도 하고, 팔과 다리를 흔들며 춤을 추기도 했다.


30분쯤 지났을까, 아이는 ‘여름냇가’라는 노래를 발견했다. 그 노래가 들리자 아이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여느 때처럼 ”나 이 노래 좋아해“라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소파에 누워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나도 몸을 눕혔다. 소파는 좁았지만, 아이와 나는 딱 맞게 들어갔다. 아이는 내 팔에 머리를 기대고, 나는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거실에는 작은 무드등만 켜져 있었다. 노란 빛이 벽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름냇가’의 멜로디와 아이의 숨소리만이 방을 채웠다. 그때의 평화로움을, 그 순간의 충만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의 분주함도, 학생들의 진학 상담도 모두 멀리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주말인 오늘, 아내는 밀린 업무로 출근했고 나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게 되었다. 낮잠 시간이었고 나는 걱정이 앞섰다. 아이는 늘 엄마 옆에서만 고집처럼 잠들었고, 내 옆에서는 좀처럼 잠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전 내내 키즈카페에서 놀았으니 피곤할 거라 생각했다.


”이제 잠자자.“

”싫어! 아빠랑 놀래!“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집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내가 잠을 재우려 할 때마다 아이는 더 크게 소리 지르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마치 일종의 보상 요구와 같은, 주중에 거의 보지 못했던 아빠와 오늘은 실컷 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사실 나도 휴식이 필요했다. 한 주의 피로가 온몸에 쌓여 있었고, 주말에는 좀 쉬고 싶었다. 하지만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아빠, 이거 하자“라며 장난감을 가져오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내 피로는 갑자기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결국 아이는 저녁 7시까지 버텼다. 저녁을 먹고 아내가 아이를 재웠다. 아이 옆에 누워 고요히 숨 쉬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꿈이라도 꾸는지 아이의 눈꺼풀이 살짝 움직인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꿈속에서도 아빠와 놀고 있을 것만 같다. 그 생각에 가슴 한켠이 저릿해진다.


요즘 들어 점점 더 바빠지는 일상 속에서, 시간은 모래시계처럼 빠르게 흘러내린다. 그 모래알 하나하나가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들이다.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