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4. 수
우리 집 아이는 잠이 덜 깬 눈으로 할머니 댁으로 간다. 엄마 아빠가 아침 일찍 나서야 하는 까닭이다. 늘 내가 아이 손을 잡고 할머니 댁 문을 똑똑 두드리고는 아이를 맡기고 나서곤 하는데, 오늘은 아이가 늦잠에 푹 빠져있고 나는 아내보다 일찍 나가야 해서 아내가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와 가는 걸 싫다고 한다. 고개를 갸웃하고 물어보았다. 엄마랑 가면 할머니 댁에서 밥만 먹고 곧장 어린이집으로 가야 하는데 아빠랑 가면 할머니 댁에서 장난감 자동차도 굴리고 과자도 먹고 한참을 놀 수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 나는 그제야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까닭을 알았다. 아이는 내가 좋은 게 아니라 내가 주는 시간이 좋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떼어놓고 가려 하니 아빠와 가겠다고 울먹울먹 거린다. 급한 마음에 텔레비전을 틀어주고 아이를 안아주며 ‘아빠 다녀올게’ 하고 일어서려는데 아이의 작은 손이 내 손을 꼭 잡는다. ‘가지 마’라고 한다. 아이의 손끝에서 무언가 따스하니 떨려 오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빠와 떨어지기 싫은 아이의 마음인지, 아이와 떨어지기 싫은 나의 마음인지 분명치 않았다.
아이는 엄마보다도 아빠가 더 좋다고 한다. 내가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이는 자동차 놀이도, 블록 놀이도 다 내팽개치고 두 팔을 번쩍 들고 ‘아빠!’ 하며 신나게 달려온다. 그리고는 내 품에 폭 하니 안긴다. 아이의 머리칼에서 우유 냄새와 햇볕 냄새가 섞여 난다. 아내가 들어올 때는 그저 그 자리에 앉아서 ‘엄마 왔어?’ 하고 말할 뿐이다. 내가 아이를 꽉 안아줄 때, 아이의 작은 손도 내 등을 힘껏 감싸 안는다. 그 작은 손이 내 등 전체를 감싸는 것 같다.
또,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아이가 하는 일은 나를 깨우는 일이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살며시 다가와 나를 흔들며 ‘아빠, 놀자’ 하며 첫마디를 던진다. 엄마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다 있어도 아이는 언제나 나만 찾는다. 나도 지칠 때가 있어서 ‘오늘은 엄마랑 놀아’ 하거나 ‘혼자 놀아’ 할 때도 있지만 아이는 ‘아빠랑 놀래’하며 막무가내다.
아이와 함께 거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자동차 장난감을 이리저리 굴리고 퍼즐 조각을 맞추곤 한다. 그런데 놀다 보면 아이는 장난감은 제쳐두고 자꾸 내게 말을 걸어온다. ‘아빠, 이거 봐봐. 멋있지?‘ 하며 자동차 하나, 블록으로 만든 집 하나, 별것 아닌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럴 적에 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하는 것을 보면 나와 ‘함께’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보인다. 그 마음이 물결처럼 넘실거려 나에게 온다.
이렇게 나의 하루하루는 나를 향한 아이의 사랑으로 차곡차곡 쌓인다. 살면서 이처럼 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어릴 때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르고 자랐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집에 잘 계시지 않았고 계실 때면 부모님은 늘 다투셨다.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아버지 흉을 나에게 늘어놓곤 하셨는데 그게 싫어서 나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곤 했다. 그런 집안 사정이니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와 동생에게 다른 집 아이들처럼 따뜻한 손길을 주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젊은 시절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려고 안달이 났었다. 그런데 사랑받으려는 마음으로 하는 일들은 늘 지나치고 어긋났다. 내가 베푼 호의는 상대에게 부담이었고 상대는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다시 다가섰고 상대는 다시 멀어져 갔다. 그때마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인가보다’하는 생각이 가슴에 시커먼 먹물처럼 번졌다. 다행히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나이가 들고 부모님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그 마음은 조금씩 옅어져 갔다.
지금도 가끔 사랑받고 싶어서 어정어정하는 행동들이 튀어나오긴 한다. 하지만 아침마다 내 손을 꼭 잡는 아이의 손길을 느낄 때면, 퇴근길에 ‘아빠!’ 하며 달려오는 아이를 볼 때면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이제는 지워도 될 것 같다. 아이는 나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저 사랑을 준다. 나 또한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주고 싶어서 주는 사랑을 아이를 통해 배운다.
매일 저녁 아이와 나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우유를 마신다. 아이는 내 곁에 바싹 붙어앉아 나에게 기댄다. 컵을 든 아이의 작은 손과 우유 거품이 묻은 입술과 나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와 내 팔로 전해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나의 하루는 평범하고도 놀라운 사랑으로 채워지고 있구나 하고. 창밖에는 가을 저녁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아이는 우유를 다 마시고는 ‘아빠’ 하고 컵을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