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렇게 깊어 보이는 바닷물이 바로 옆에서 넘실댄다. 마치 배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작년 여름이었나 가을이었나 하고 폰 갤러리를 찾아보니 무려 4년전. 2020년이었다. 사진속의 사람들은 넓은 야외 바닷가에서도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날은 영도 청학동 어딘가 폐공장에서 열리는 사진 전시회를 보러 갔다. 조선자리 였는지 무슨 공장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내에서는 볼 수 없는 운동장보다 넓은 공장 마당에 차를 주차하고 들어가 보니 높은 천장이 있었고 한 때 그 공장에서 썼을 것 같은 도구들이 곳곳에 있었다. 아,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공장은 이렇구나. 문을 닫지 않았더라면 여기 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보지는 못했겠구나.
전시회는 너무나 멋졌다. 그날 전시된 사진들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그 건물 전체가 거대한 현대미술품 같았다. 공장 밖 주차장에 서있으니 바다가 내 바로 옆에서 물결치고 있었고 마주 보이는 곳에서는 부산항대교와 신선대부두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날 본 바다빛깔은 비치에서 모래위에 얇게 펴지는 바닷물색과는 완전히 달랐다.
부산 영도가 커피로 핫 해진건 벌써 여러해가 되었다. 큰 조선소와 공장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 카페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영도 건너 부두의 풍경과 바다, 그리고 폐 공장들이 어울어지면서 남다른 모습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수영에 있는 카페 f1963 테라로사가 고려제강이라는 부산의 철강공장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영어 독해지문에서나 봤을 법한 건물 업사이클링의 모범 같아 그저 멋져 보였는데, 부산의 중요 산업 시설들이 모두 떠나고 그 자리에 카페들이 생기고 있는 것을 그저 좋게만 볼 수 없겠구나 싶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부산에서 계속 살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모두 수도권으로 떠나고 있다는 뉴스는 더 이상 뉴스도 못된다. 노인과 바다만 남은 부산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대학을 막 졸업한 딸아이 친구들도 하나둘 서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게 되어간다. 팔순의 내 아버지도 젊은 날 고향을 떠나 부산에 와서 평생을 살았고, 남편은 어린 날에 역시 고향을 떠나 부산에 왔다. 나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서 여기가 내 고향이다. 세상사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마는 이 역동적인 도시가 변화의 파도 속에서 잘 헤쳐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 밖에는 할 게 없다.
얼마전에 서울 갔다 오는 길에 대전에 들러서 성심당 빵집을 들렀다. 대전이라고는 아주 오래전에 계룡산 갑사와 동학사에 갔던 기억 말고는 없는데, 성심당이라는 빵집의 유명세를 듣고 들렀다. 뜨거운 여름날이었고 평일 오후였는데도 빵집에 가려는 사람들의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빵을 사서 나오는 사람에게 얼마나 기다려서 들어갔냐고 하니 자신은 한시간을 기다렸는데 지금은 아마도 더 오래 기다려야 할 거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부산까지 내려가야 하니 결국 성심당 본점을 돌아돌아 줄서있는 사람들의 행렬을 구경하고 별로 기다리지 않아서 먹을 수 있는 포장 팥빙수를 사서 돌아서야 했다. 골목골목 줄선 사람들과 성심당에서 나눠준 양산 용 우산 구경 그리고 사람들의 줄이 길 가는 다른 행인들을 방해할 까봐 곳곳에 서있는 성심당 젊은 직원들 구경 그것만으로도 대전에 내린 이유는 충분했다.
지방에서 성공하면 서울에 입성하는 것을 최고의 출세로 치는 풍토에서 당당하게 대전에서만 빵을 파는 그 마음과 그 성공이 어찌나 보기 좋았는지 모른다. 그 빵집이 고용한 직원만 해도 천명에 가깝다든지 대전에 있는 한 은행에는 그 빵집의 직원 전용 코너가 있다든지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의 한 본사 영업이익보다 더 높은 이익을 보았다든지 이런저런 뉴스를 들었지만 무엇보다 반가운 건 지방에서의 성공 그 자체였다.
부산은 현재 진화 중이다. 바닷가 조선소와 공장들이 아시아 최고 관광 명소가 될 날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대전에 성심당이 있다면 부산에는 모모스커피가 있음을 알리려는 포부가 있는 이들도 있고, 영화의 바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있고 무엇보다 도시와 함께 하는 바다가 있으니.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