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놓친 행운, 잘 못 들어선 길에서 만난 행운

국립공원 금정산

by 연분홍

금정산국립공원이 지난 3월 3일에 출범했다.

범어사 입구에 금정산국립공원을 알리는 표지판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친구들과 보러 가기로 했다.

범어사 매표소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를 타려면 집에서 좀 여유 있게 나서야 하는데

결국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다음 버스는 3분 후에 오는데, 내가 버스길에 나왔을 때 건널목 신호가 바뀌어버렸다. 어쩌나 다음 신호를 기다리다가는 늦을 게 분명하다.

나는 건널목에서 기다리지 않고 다음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음 정류장에는 노포동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더 많다.

앗, 그런데 다음 정류장은 건널목을 세 개나 건너야 한다니. 터널 앞 사거리라서 신호도 오래 기다려야 하고.

건널목을 기다리다 보니 버스가 하나 둘 지나간다.

이젠 어쩔 수가 없다. 마음 편하게 버스를 놓치고 택시를 타고 가기로 마음먹고 있는데.


그때 친구의 전화가 왔다.

친구랑 범어사 매표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도 늦어서 남편이 데려다준다는 거다.

여기서 기다릴게^^

아, 이렇게 재수가 좋을 수가 ㅋ

건널목 신호가 내 앞에서 바뀌지 않았더라면, 나는 버스 타고 범어사역에서 90번을 갈아타고 올라갔을 텐데, 친절한 친구의 남편 호의 덕분에 편안하게 약속 시간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에 막 올라탔을 때 친구가 전화를 했으면 어쩔 뻔했나 몰라. 역시 타이밍이 중요하다.


국립공원이 된 금정산에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았다. 우리는 새로 설치된 국립공원 표지판 앞에서 사진을 찍고 다른 친구들을 기다렸다.

국립공원이 되면 좋은 점도 있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다니면서 내놓았던 작은 길, 숲길, 많은 길들을 더 이상 다닐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우리가 안 가 본 작은 길을 가보기로 했다.

4명 모두 처음 가 보는 길이었다. 걷는 내내 이런 길도 있었어?

일요일이었지만 우리가 가는 길에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금정산에는 이제 소나무가 거의 없다. 침엽수림이 거의 없고 겨울에 모두 잎을 떨어뜨리는 나무들만 있으니 산의 속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계절- 겨울부터 초봄이 산에 가기 제일 좋은 때인 것 같다.

잎 하나 없는 나무들과 금정산의 바위길을 따라서 가다 보니 점점 우리가 가려던 길과는 멀어졌다. 우리는 숲 속 둘레길을 걸을 예정이었는데, 금정산 산허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두 번째 행운이었다. 범어사와 인접한 부속 암자들만 알았는데, 금정산의 거대한 암석들을 배경으로 둔 작은 암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길을 잘 못 드는 바람에 고요한 금정산의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니 이런 행운!

용락암을 지나 산 중턱을 한참을 걸었더니 회룡정사로 향하는 푯말이 있었다. 친구가 그 푯말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마 4 망루- 금정산 능선길에 접어들었을 거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 길이었다. 가을 낙엽이 그대로 쌓여있고 언 땅이 녹으면서 질척거려서 내려가기 힘든 좁은 길이었다.

그렇게 잠깐 내려가니 말 그대로 기암괴석이라 할 만한 바위와 그 앞에 회룡선원 암자가 있었다. 아, 여기는 예전에 내가 아래쪽에서 올라오다가 힘들다고 포기하고 내려갔던 곳이다.

여름에 파란 수국으로 유명한 곳인 줄은 알았는데, 끝까지 못 올라왔던 곳이라니.

절에는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어르신들도 많이 보였다. (아이고 부끄럽다. 여기를 못 올라와서 힘들다고 내려갔구나..)




절 바로 뒤에 큰 바위들이 있고, 그 먼 뒤쪽에는 무명바위(?)라는 ‘이름이 있는 바위’들이 장관으로 우뚝 서 있었다. 우리가 산 아래 멀리서 금정산을 바라보면 보이는 바위 무리들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 같아 보였다. 그러니까 처음 보는 바위들은 아니었다는 거다.

이제 산 아래에서 무명바위를 보면 알아볼 수 있겠다.

이름이 이름 없는 바위 무명바위가 아니라 무명바위라는 이름을 가진 바위란 말이다. 하하

사실 회룡선원은 오다가 포기한 전적이 있어서 가끔 지도로 그 위치를 가늠해 보곤 했다.

회룡선원 위에 무명암이라고 쓰여있어서 나는 또 다른 암자 이름인가 했다. 그런데, 바위 암이었나 보다.

절 앞마당에는 수국이 심어져 있었다. 여름에 여기 다시 올 수 있을까? 파란 수국 장관을 보고 싶긴 하지만 하산길의 긴긴 내리막을 생각하니 자신이 없다. 꼭 온다면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게 아니라 금정산 동문에서 능선길을 따라오다가 아래로 내려오는 코스라면 고려해 볼 수도 있다.

하산길을 녹녹지 않았다. 산을 잘 타는 친구 둘은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지만 등산만큼 힘든 게 하산길 아닌가. 천천히 내려오는 데 다 내려오기도 전에 갑자기 무릎 어딘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큰 통증이 아니라서 산에서 내려와서 점 삼을 먹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지도를 보니 우리가 만성암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와야 금정산 숲 속 둘레길을 걸을 수 있었다. 우리는 위쪽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이었다.

예정에 없던 코스였지만 모두 만족한다고 했다.


내가 꼭 타야 할 버스를 제시간에 못 타는 바람에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고, 계획했던 길을 제대로 찾지 못했지만 더 좋은 산길을 걷는 행운도 있었다.

삶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버스를 놓쳤다고 너무 속상해 하지 말고 길을 잘 못 들었다고 조급할 것도 없다.

그런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