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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민 Oct 17. 2018

바라나시에서의 짧은 단상들.

인도 바라나시 여행

델리 공항에 내려서 처음 딛는 발걸음부터 입국장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멀다. 인도를 여는 발걸음이 길어지는 만큼 인도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감도 점점 고조된다. 마침내 델리 공항을 나서는 순간 수천 년 전의 향을 아직 지니고 있는 인도의 공기가 한 번에 덮쳐온다. 

인도와 당신의 첫 만남이 감동적일지, 반가울지, 실망스러울지 알 순 없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감정 이상의 감정을 느껴보게 될 것이다. 인도는 당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 있는 곳이니까. 그래서 환영한다. 인도에 오신 것을. 



-세상의 끝자락이 있다면?-

‘영혼의 정화’라는 생각만을 품고 갠지스 강에 처음 가게 되면 순서 없이 들이닥치는 수많은 삶과 죽음의 모습에 오감이 혼란에 빠진다. 화장터에서 강으로 뿌려지는 유골과 재 그리고  강물을 마시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 목욕하는 사람들, 수영하는 사람들, 고기 잡는 사람들, 배를 타는 사람들, 빨래하는 사람들, 명상하는 사람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잠자는 개들, 돌아다니는 소들까지. 당장 내 눈앞에 벌어지는 장면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내가 살던 곳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려 하면 혼란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인도인들은 삶이 다한 후 자신의 육신이 갠지스 강에 뿌려지길 소망한다. 그러면 윤회를 끊고 해탈로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갠지스 강은 인도의 모든 것들이 마지막으로 흘러드는 곳이다. 만약 세상의 끝자락이 있다면 그 끝자락에서 흐르는 강은 분명 갠지스 강의 모습일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갠지스 강은 경계가 희미하다. 

강과 하늘이 그러하며 

사람과 동물도 그러하고

무거움과 가벼움이 그러하며

삶과 죽음조차 그러하다.

갠지스 강의 수면 아래로는 망자들이 잠기고 수면 위로는 삶이 계속 살아 흐른다.

갠지스 강에서의 삶과 죽음의 경계는 뒤섞이며 희미해진다.

갠지스 강 건너편은 죽음의 땅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죽음이 땅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해가 떠오른다. 삶과 죽음이 순환되면서 경계가 다시 희미해진다. 



-갠지스 강에서 씻으면 깨끗해질까?-     

많은 부유물이 떠다니고 탁해 보이는 갠지스 강에서 씻는다는 것은 무엇을 씻는다는 것일까? 인도인들에게 갠지스 강은 성스러운 강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먼 지역에서도 목욕하러 오는 순례자들이 많다.

‘영혼의 정화’를 생각하며 많은 외국 관광객들도 갠지스 강을 찾아오지만, 인도인들처럼 몸을 씻을 용기를 차마 내지는 못한다. 갠지스 강을 의심하면 몸을 담글 수 없다. 믿어야만 몸을 여기에 몸을 담글 수 있다.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고 몸을 말리는 소년의 모습에서 젖은 날개를 잠시 말아 접은 천사의 모습을 본다. 인도인들은 갠지스 강에서 몸을 씻는다. 그들은 깨끗해진다.



당신의 간절한 염원과 바람은?

신을 부르는 노랫소리, 종소리, 뿔피리 소리 그리고 불꽃과 향냄새가 어우러져 진행되는 아르띠 뿌자(불의 의식)는 매일 밤 갠지스 강 가트(갠지스 강의 층계)에서 열리는 힌두교 종교의식이다.  갠지스 강의 품을 그리는 인도인들의 기도와 염원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어둠을 밝히고 몽환적인 밤을 만든다. 사제들은 하루를 감사하며 신을 부르는 만트라(진언)를 읊조린다. 의식이 절정에 달하면 꽃잎을 몇 번 하늘 위로 뿌린다. 그들의 간절한 기도와 염원을 마무리하는 짧디 짧은 순간이다.     

종교가 없더라도 누구나 염원하고 바라며 기도하는 때는 언제든 찾아온다. 

당신의 길고 간절했던 염원과 바람이 마무리될 때도 꽃비가 내리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소원을 빌면서 살아갈까?

아르띠 뿌자에 온 사람들이 신께 소원을 빌며 갠지스 강에 꽃과 촛불을 담은 작은 접시(디아)를 띄운다.

다른 이들의 소원과 함께 내 소원도 갠지스 강으로 흘려보낸다. 

갠지스 강의 밤은 이렇게 수많은 소원이 흘러드는 시간이다. 

매일 밤 수많은 사람의 소원을 품어 안고 흐르는 곳이 여기 갠지스 강이다.



그때 흘러 보낸 소원은 지금 어디를 향해 흘러가고 있을까?



미로의 출구는?

삼천년이라는 도시의 역사가 만든 바라나시 골목길은 이리저리 얽혀있는 복잡한 미로이다. 방향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숙소로 돌아가는 길조차도 헤매기 일쑤이다. 이 복잡한 미로의 출구는 갠지스 강을 향해 있다. 길을 잃어버렸다면 갠지스 강이 어느 방향에 있을지 생각하고 다시 걸으면 된다. 골목길을 헤매다가 갠지스 강을 다시 보게 된다면 이전보다 더욱 반가울 것이다. 삼천년의 미로에도 출구가 있듯이 백년의 우리 인생의 미로에도 출구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No ploblem?

시가지의 중심격인 고돌리아 근처의 길은 혼돈 그 자체이다. 사람, 소, 자전거, 마차, 오토바이, 릭샤, 흙먼지, 소똥, 경적소리, 복잡한 색채, 냄새 등 인도의 모든 것들을 쏟아부은 듯한 곳이다. 제발 누군가 나서서 이 혼돈을 바로 잡아주었으면 좋겠지만 그 중심이 될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이러한 상황이 아무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다. 혼돈 속에서도 그들의 질서가 있는 듯하다. “No ploblem!”이다. 



삶은 어떤 속도로 흐를까?


고돌리아 근처의 복잡한 길 위에서는 제각각의 방향으로 제각각의 속도를 내며 지나가는 수많은 행인들을 만날 수 있다. 이 복잡한 길 위에서 각자는 얼마의 삶의 속도를 지니며 살아갈까?

상대속도는 관찰자가 관찰하는 대상의 속도를 말한다. 서로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삶을 함께 걷는다면 서로가 인식하는 삶의 상대속도는 0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속도로 본다면 삶은 흘러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공유하는 순간은 언제 어디서나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같은 속도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고 영원이다.



오토릭샤에는 왜 사이드미러가 없을까?

오토릭샤는 사이드미러가 없거나 있어도 접혀있는 경우가 많다. 좁은 도로에서 자동차, 오토릭샤, 오토바이, 자전거, 사람 그리고 소까지 아슬하게 비껴가며 운전하기 때문에 사이드미러가 있어도 금방 부서질 것 같다. 

사이드미러도 없고 경적은 쉬지도 않고 울려대며 끼어들기와 추월은 기본이며 가끔은 역주행까지 하는 오토릭샤는 탈 때마다 진 빠지는 흥정까지 해야 한다. 내릴 때는 흥정했던 요금보다 더 비싸게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오토릭샤에 대한 기억이 추억으로 남는 이유는 오토릭샤를 타며 보는 인도의 풍경이 극적인 장면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 카스트 제도가 지금도 남아있나요?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과 함께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1947년에는 불가촉천민 출신인 암베드카르가 법무부 장관에 올랐으며 1997년에는 불가촉천민 출신 나라야난 대통령까지 탄생하였다. 급격한 경제성장 속에서 카스트 제도로 인한 출신 신분에 의한 한계는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배를 타고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갠지스 강 건너편을 향하면 사공이 그쪽에는 불가촉천민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어서 깊숙이 들어가지 말라고 일러준다. 카스트제도는 아직 인도 사회에 깊이 뿌리내려있는 인도 문화의 일부이다. 



모네가 갠지스 강에 왔었더라면?

‘루앙 대성당’이 빛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30여 점의 연작으로 남긴 모네가 여기 갠지스 강에서도 연작을 그렸다면 어떤 그림이 나왔을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모네는 ‘갠지스 강의 어느 쪽 방향을 선택하여 이젤을 세웠을까?’하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갠지스 강을 몇 번이나 다시 찾았지만 갠지스 강을 사진 한 장으로 표현하기란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갠지스 강에서 보이는 삶의 극적인 여러 모습에 이곳저곳에서 연신 셔터를 눌러댈 뿐이다.



갠지스강의 아침은?

아침이 되면 이불을 개고 몸을 씻고 시작하듯이 갠지스 강도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어제의 때를 벗겨낸다. 갠지스 강에 흐르는 물은 이미 어제의 물이 아니고 

갠지스 강의 아침은 정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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