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의 여행 기록
배낭에 카메라를 넣고 꾸깃꾸깃 옷가지를 쑤셔 넣는다. 마지막으로 세면도구를 넣고 지퍼를 잠근다. 빵빵해져서 더 이상 들어갈 것이 없는 배낭을 보면서 마지막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항상 여행 준비의 마지막 고민은 ‘이번에는 기차 안에서 무슨 책을 읽을까?...’하는 것이다. 그 고민은 나를 참 즐겁게 만든다. 기차를 타는 것은 나에게 참 설레는 일이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책에 ‘노르웨이의 숲’을 동봉 포장하여 판매하는 것을 발견했다. ‘노르웨이의 숲’을 민영 누나가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었던 일을 떠올리며 싼 가격에 바로 책 두 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가 좋다.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며 엉덩이가 살짝 들릴 것 같은 관성이 느껴진다. 이어 휙휙 지나가기 시작하는 창 밖의 풍경이 여행의 시작을 알린다. 지나가는 풍경들을 옆에 두고 하루키의 책 포장을 뜯어본다. 바로 ‘노르웨이의 숲’을 펼친 순간 눈을 의심했다. 책 안이 온통 하얀 백지였던 것이다. 표지는 분명 책인데 책 안은 공책이었던 것이었다. 출판사의 상술에 놀라며 어쩔 수 없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펼치게 되었다. 제목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여행 시작이 조금 찝찝해지기 시작했다.
경주 역에 도착했다. 혼자 여행할 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첫 도착지에서 혼자 내리는 순간. 여기서부터 진짜 나 혼자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하면서 남들에게는 최대한 혼자이고 처음인 티를 내지 않고 싶은 순간이다. 바로 관광안내소로 가서 직원과 밝게 인사하며 긴장을 풀고 예약한 숙소 위치를 묻고 지도를 얻었다. 그리고 지도를 한번 펼쳐보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자 하는 여행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마음껏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불평하는 사람 없고 나 혼자 감내하며 여유롭게 그냥 걸으면 된다. 걷기에 멀면 먼데로 오래 걸으면 되고 길을 잘못 들면 다시 물어물어 바른 방향으로 걸어가면 된다. 지도를 보니 경주 시내 근처에 유적지들이 모여 있어서 마음 내키는 방향 걷기에는 아주 쉬운 여행지였다. 과연 조금만 걸으니 벌써 커다란 릉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주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야경이 좋은 안압지에는 해가 질 무렵 입장했다. 안압지는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포인트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미 거기에 삼각대를 놓고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 뒤로는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떠있는데 나는 그 보름달을 더 담고 싶었다. 괜히 남들 찍는 자리에서 똑같은 사진을 찍기 싫었던 마음도 있어서 좋은 자리 건너편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사진 찍기 좋은 자리에 가서 사진을 찍기로 타협했다. 이 포인트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나처럼 여기저기서 찍어보다가 결국 정답이 있는 여기로 온 것이겠지? 생각하며 날 위로했다.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좋은 카메라가 있으니 혼자 다녀도 남들 눈치 덜 보고 조금 더 떳떳하다.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왜 혼자 여행 왔어요?’라는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훨씬 수월해진다. 그리고 눈으로 보았던 풍경들을 어떻게 담아낼 수 없어서 너무 안타까웠던 지난날들에 비해 이제는 그 안타까움을 여행하는 동안 내가 본 것, 느낀 것을 어떻게 더 잘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로 대신한다.
숙소는 경주역 근처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였다. 4인실이었는데 내가 가장 먼저 들어왔고 이어 두 명의 룸메이트들이 들어왔다. 한 명은 수능을 끝낸 19살, 또 다른 한 명은 군입대를 앞둔 21살이었다. 나이 차이도 조금 많이 나고 두 친구들 앞에서 내 나이를 말하기가 조금은 쑥스러웠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아직은 내 입으로 부르기에는 어색하고 무겁다고 생각했다. 단 하루지만 그래도 인연이라 방 안에서 맥주를 마시며 그들의 고민을 들었다.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 진정 이 길이 내가 길이 맞는지... 혼자 여행하며 생각을 하고 싶었다고들 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의 앞날에 대해서 무겁게 고민하는 그 두 친구를 보며 치기 어린 고민이라고 생각하기도하는 한편 나는 저런 치열한 고민 없이 20대를 보냈던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이들보다 더 어렸던 내 지난 이십 대를 속으로 몰래 위로하며 이십 대에 들어선 그들에게 술 한잔 더 권했다. 이제 삼십 대에 들어선 나에게 권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음날 게스트하우스의 조식을 먹으면서 ‘양동마을’ 안내책자가 눈에 띄었다. 원래 남산에 올라갈 계획이었는데 양동마을로 향하게 되었다. 양동마을에서 나와 같은 ‘영주’에 살고 있었고 스무 살인 일행을 구했다. 반가운 마음에 입장료를 내주며 마을을 그 친구와 같이 반나절쯤 동행했다. 일정이 달라서 헤어질 때쯤 그 친구가 나에게 물어보았다.
“저는 생각 좀 하려고 혼자 여행 왔는데 생각이 잘 안되네요. 형은 여행하면서 혼자 어떤 생각하세요?”
나의 대답은 간단했다.
“응 나는 생각 안 하려고 여행해.”
여행 다닐 때는 오롯이 현재에 살 수 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어디서 자야 할지 지금 당장 해야 할 것들의 긴장 속에서 현재에 충실하게 된다. 지나가버린 과거와 오지도 않은 미래가 끼어들 여유는 줄어든다. 그런데 이제는 혼자 여행에 적응했는지 현재에 충실하기만이 쉽지만은 않아지고 있다.
문득 양동마을 여기에서 하루 묶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을 나 스스로 틀기 시작하면서 살짝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꼈다. 바로 양동마을 안 초가집으로 된 민박집에 짐을 풀고 가벼운 몸으로 양동마을의 풍경을 찍었다. 6시가 넘자 양동마을은 금세 어두워져서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갔다. 보름달 밝은 아래 초가집 방에서 이불 깔고 나 혼자 있다는 사실이 뭔가 즐거웠다. 이런 곳에서 책을 읽는 것은 기차 안에서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불 위에서 엎드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펼쳤다. 이번 여행의 첫 번째 틀어짐을 안겨다 준 책이었는데 그래도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런 오랜만의 몰입.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약간의 피곤함이 금세 단잠을 안겨다 주었다.
다음날 양동마을의 아침을 담고 경주로 향했다. 원래 올라가려 했던 남산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지금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된다. 남산을 오르면서 피톤치드의 상쾌함이 내 몸속을 씻어주었다. 그 상쾌함 하나만으로도 남산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이 올라가서 멀리 내려다보니 경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심과 넓은 평야지대가 섞여있는 경주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은 과거이기도 했고 현재이기도 했다. 지금도 유적이 발견되고 다시 복원하고 있는 경주. 옛날 왕들의 거대한 무덤들이 도시 가운데 박혀있는 것을 보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경주의 모습을 내 눈에 담고 카메라에 옮겼다.
과거는 지나가버린 죽은 것이라고 잊어버리고 부정하는 것이라고만 이해했던 내 생각에 약간 수정이 필요함을 느꼈다. 잊어버렸지만 다시 되살릴만한 가치가 있는 과거라면 현재로 다시 복원하여 돌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차피 과거 위에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니까. 지금의 경주가 있듯이.
내려가는 길에 머리 위에서 까치가 나뭇가지를 물고 둥지로 돌아가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어딘가 여행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고 알려주는 듯했다. 부모님 드릴 경주 법주와 황남빵을 사들고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이제 나의 다음 여행지는 인도이다. 인도에서는 나는 무엇을 만나게 될까?... 내가 글쓰기 모임 숙제로 쓴 글의 주인공이 마지막 장소가 가고 싶어 했던 장소가 인도 갠지스 강이었다. 그곳을 내가 정말 가게 되었다. 그 주인공이 가고 싶어 했던 갠지스 강은 사실 내가 가고 싶어 했던 곳이었나 보다.
글에는 자신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던 작가님 말씀이 생각난다. 이렇게 살며 사랑하며 쓰며 난 삶을 여행해 나갈 것이다.
-5년 전 서른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