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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낙하 Nov 19. 2023

언니와 나

과거 작성했던 글에 덧붙여 작성한 글입니다.

3'하루 500자 정권지르기' 모임에서 진행한 2주 차 글쓰기 활동입니다.

과거 작성했던 글에 덧붙여 작성한 글입니다. 언젠가 꼭 남은 결말부까지 완성하고 싶습니다.


글을 쓰며 들었던 노래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LGWNQX-XgE



라디오에서는 진행자가 클래식을 소개한다며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생각나는 음악이 있는데요. 이미 청취자분들도 익히 아실 것 같은 유명한 클래식이죠. 비발디의 사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표현한 곡인데요.  그중에서도‘ 겨울’ 함께 듣고 오실게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손을 뻗어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특별히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을 무마하고 싶었다. 차 밖에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음악을 틀면, 꼭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으니까. 나는 지금이 꿈속 같았다.     


안평군 현산읍 온수리. 산이 많고 예로부터 현인들이 많아 '현산(賢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마을. 읍내 풍경은 별다를 게 없었다. 오래된 주택들과 늘어선 상가 건물들은 상가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낡고 초라했다. 이 층 이상의 건물은 찾아보기도 힘들고, 마땅한 관광지도 없어, 오가는 사람도 적은 시골 동네. 옛날 영화에서나 볼 법한 네모반듯한 글꼴에 군데군데 글씨가 떨어져 나간 낡은 간판들과 붉은 벽돌 소재의 건물들. 낡은 목욕탕과 개업한 지 30년은 된 듯한 오래된 이용원. 이 동네 자체가 시간이 멈춘 곳 같았다. 언니는 이런 곳이 뭐가 좋다고 이사까지 한 거람.     


언니의 가게는 상가의 가장 끄트머리에서도 조금 올라간 곳에 있었다. 읍내의 끝, 옆쪽으로 종점에 다다른 버스들이 한 바퀴 돌아나가는 넓은 공터가 있었고, 창고를 겸하는 간이 정류장이 덩그러니 위치한 곳. 주위에는 가게보다 주택이 많은, 말하자면 경계선 같은 곳. 많고 많은 가게 사이에 왜 하필 이런 곳에 사진관을 열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알기에 언니는 가난한 사람은 아니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서울에서 사진작가로 일할 때는 아이돌 가수의 앨범 재킷을 수없이 찍을 만큼 나름대로 입지가 탄탄했고, 업계에서도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남의 업계 사정이야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방송작가로 방송국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다 보면 알음알음 알게 되는 것도 많은 법이었다.     


그러니 이깟 시골 동네, 마음만 먹었다면 읍내 한복판에 가장 목이 좋은 건물에 자리를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워낙 낙후된 동네이다 보니, 읍내 한복판에 비어있는 가게들은 초행인 내 눈에도 띌 만큼 많았다. 언니의 재정상태를 생각하면, 아예 새로 건물을 올리는 것도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언니는 숱한 명당자리를 놔두고 읍내 가장자리에 자신의 가게를 차린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애초에 나는 언니의 시골행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시골에 쉽게 적응할 리 만무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방송작가로 일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시골을 돌며 산속의 은둔자들만을 찾아다니는 방송에 참여했던 적도 있었고, 귀향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방송에 참여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텔레비전에 비치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시골이란 연고, 재산-예컨대 자신 소유의 토지-이 없으면 적응하기 어려운 곳이라는 것, 실제로 적응하지 못해서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은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곳에서 연고도, 사업 수완도 없어 보이는 언니가 적응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사업가들은 제각기 다른 사람이었으나, 말솜씨가 좋고, 말 하나하나, 제스처 하나하나에 설득력이 있는 사들이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많았고, 손익계산이 빨랐다. 언니는 그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정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마음이 여려 감정에 호소하는 사람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가게를 열고 장사를 한다니, 누군가 언니를 감언이설로 꼬드기기라도 한 모양이지. 장사가 되기는커녕 사기나 당하고 돌아오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서 해보면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겠지.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제 발로 서울로 돌아오겠거니. 돌아온다면 새 일감 정도는 기꺼이 주선해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언니는 오 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종종 잘 지내고 있다며, 안부 메시지가 오긴 했지만, 전화나 서울에 들르겠다는 연락이 온 적은 없었다. 나 역시 언니에게 먼저 전화를 걸거나, 언니가 있다는 곳으로 찾아간 적은 없었다. 언니의 사진관 주소는 알았지만, 사진관의 상호도, 언니가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언니가 하는 일을 상상하며, 그저 잘 지내고 있겠거니, 멋대로 단정 지었을 뿐이다.     


언니의 안부에 관심이 없었다거나, 특별히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언니를 신경 쓰기에는 나에게도 여유가 없었다. 방송국이라는 곳은 언제나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었고, 자료 조사나 섭외를 위해서 하루에도 수십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를 돌리고, 전국 각지를 돌며 사전 답사를 나가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나는 내 일상을 사는 것조차 버거웠다.  새벽 늦게 집에 돌아와, 밀린 집안일을 하고 자리에 눕기에도 나의 삶이 고단했다. 혼자 살기에 나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서울의 방값은 터무니없이 비쌌고, 물가는 끊임없이 올랐다. 나는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했고, 공과금을 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많지 않았다.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80만 원. 매달 내는 관리비 8만 원. 서울에서 혼자 산다는 건, 독립한 지 칠 년이 되도록 녹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에는 시간이 없었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직장과 떨어진 곳에 산다면 월세는 조금 아낄 수 있겠으나,  출퇴근 시간이 한없이 길어졌다. 나의 퇴근 시간은 언제나 일정하지 않았고, 직장에서 이 이상 멀어진다면 잠자는 시간을 한계 이상으로 줄여야만 했다.     


언니와 함께 살았을 땐 지금처럼 빠듯하게 살진 않았다. 월세도, 공과금도 모두 절반씩 나누어 내는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는 언니가 낮에 해야만 하는 일들-예컨대 은행에 가는 것 등-을 처리해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남겨진 삶이 버거웠다. 그래서 언니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조금은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휴일에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은행에 가거나 동사무소에 들러 업무를 처리할 때마다 나는 때때로 언니를 그리워했다. 언니가 떠나지 않았었다면 좋았을 텐데. 언니가 떠난 것을 아쉬워했던 것은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른다. 부모님도 은퇴 후엔 경기도 외곽,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생활을 즐기시는 마당에, 언니마저 시골로 떠나면, 나는 혼자가 되니까. 나는 나에게 자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12월임에도 끝내주게 화창한 날씨였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바람마저 불지 않는 화요일 오후. 12월 중순을 넘어 연말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처럼 따뜻한 날씨. 라디오에서는 야외 활동하기 좋은 날씨라며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언니의 부고를 들은 것은 12월 12일이었다. 같은 날 아침, 가게와 조금 떨어진 산 중턱, 등산로 아래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녹지 않은 얼음을 밟아 허술하게 망가져 있던 울타리 너머로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 병원으로 향했지만, 응급실이 마련된 가까운 병원까지 한 시간이나 걸려서 구급차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언니에게 등산하는 취미가 있었다는 것조차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언니 소식을 부모님에게 전할 때에도-내가 언니의 연락처 1번이라고 했다-  언니의  신원 확인을 할 때도, 심지어 언니의 장례식 때에도 내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지나칠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이 모든 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나와는 멀리 떨어진 일 같았다.     


방송작가 일을 쉬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속해 있던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제작진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삼 개월 정도 휴직 통보를 받았지만, 해고와 다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막상 삼 개월이 지난다고 곧바로 불러준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아마도 나더러 그만두라고 하는 의미겠지. 그러나 나는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그저 내게 주어진 삼 개월간의 휴직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언니의 장례를 치르고, 슬퍼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언니가 있던 곳을 찾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삼 개월간의 휴직으로 나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언니의 정리를 해달라는 부모님의 청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고,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언니의 사진관은 여느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벽돌 소재의 낡은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 간판과 어우러지기를 바란 듯, 오래된 간판 디자인을 흉내 냈으나 아직은 새것 같은 파란색 배경에 흰 글씨로 새겨진 ‘영원 사진관’이라는 상호가 낯설었다. 언니의 사진관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이곳에 오는 것도 처음이었다. 언니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다. 오래오래,라는 의미가 좋지 않냐며, 자신의 이름-원영-도 거꾸로 읽으면 영원이 된다며 퍽 마음에 들어 했다.       


언니의 유류품이라며 돌려받은 물건들 속에 있던 사진관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언니가 가게를 열기 전에도 사진관을 하던 건물이라고 했다. 내부 공사를 하면서도 구조에는 손을 대지 않은 듯, 오래된 가게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게 앞과 벽면에 여기저기 걸린 액자들, 가게 유리에 붙은 '돌/백일 사진', '증명사진' 등의 문구들.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있는 철제 계단으로 내려가면 지하에 스튜디오가 위치했고, 입구 바로 앞에는 카운터가 위치했다. 다른 손님이 사진을 찍는 동안, 손님들이 앉아있었을 카운터 앞의 긴 의자. 카운터 너머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살림집.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부엌과 방이 있는 구조다. 미닫이문 옆으로도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아마도 사진을 현상하던 곳인 것 같았다. 참으로 낡은 인테리어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 산에 간 모양이라고 했다. 영업하지 않는 날이었기 때문일까, 가게 안은 먼지가 조금 쌓인 것 말고는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가게 문을 닫기 전에 청소했겠지.      


언니는 언제나 깔끔한 사람이었다. 같이 살 때도, 평일에는 청소기만 대충 돌리고 자리에 누워버리고 마는 나와는 달리, 매일같이 걸레질하고, 정리 정돈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독립 전, 부모님과 함께 살 때도 그랬다. 허둥지둥 학교에 갈 채비를 하느라, 돌아와서는 침대에 누워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수다를 떠느라, 언제나 어수선했던 내 방과는 달리, 언니의 방은 언제나 정갈했다. 내가 언제나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청소기를 들고 청소를 시작했다면, 언니는 학교에 다녀오면 교복을 벗어 옷걸이에 가지런하게 걸어둔 뒤 청소기부터 돌리던 성격이었다.     


종종 언니나 부모님이 내 방을 치워준 적도 있었으나, 머지않아 도로 엉망진창이 되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언제나 칭찬을 듣는 것은 언니였고, 부모님의 잔소리는 나의 몫이었다. 비단 청소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언니는 나보다 뛰어났다. 나는 할 수 없거나, 힘들게 노력해서 겨우 해내는 일들을 언니는 금세 나보다 능숙하게 해냈다.     


어린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는 놀이터 하늘사다리에 매달려 건너는 놀이가 유행이었다. 여러 개의 철봉이 일자로 이어진 모양의 놀이기구에 두 팔로 매달려, 발이나 다른 부위를 사용하지 않고 팔심만으로 다음 봉을 잡으며 끝까지 나아가는 놀이. 어느 순간에는 친구들 사이에 경쟁이 붙어, 한 번에 한 칸씩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여러 칸을 뛰어넘으며 나아갈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한 번에 많은 칸을 뛰어넘을수록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샀다. 그 시절, 나 역시 하늘사다리를 건너기 위해 수없이 노력했으나, 한 칸을 건너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붙들고 있는 철봉에서 한 손을 떼는 것이 몹시 어려웠었다. 손을 떼는 순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부단히 노력하여 하늘사다리를 한 칸씩 건널 수 있게 된 것은, 유행이 거의 끝나 아이들의 관심이 시들해졌을 무렵이었다.    

  

반면에 언니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데리러 오신 어른들이 지나가는 말로 ‘날다람쥐’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철봉을 잘 건넜다. 한 칸씩 건너는 것은 물론이고, 팔을 쭉 뻗어 세 칸씩 건너는 것도 능숙했다. 언니보다 체격이 좋은 남자아이들도 어려워하던 일이었다. 언니가 한 번에 세 칸씩 뛰어넘어 하늘사다리를 건널 때면, 아이들 사이에서 때때로 환호성이 들려오곤 했다. 그 당시 언니는 하늘사다리뿐만 아니라, 학 종이 넘기기, 공기놀이, 술래잡기, 무지개 꽃이 피었습니다 등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놀이 대부분에 능숙했고, 언제나 아이들 사이의 인기인이었다.      


꼭 놀이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언니는 놀이는 물론, 다른 것들에도 능숙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늘 성적이 좋아, 집에는 언니가 받아온 성적 우수상이 가득했고, 중학교나 고등학교 입학식 때에는 늘 학생 대표로 단상에 나가 선서를 했다. 언니는 특히 그림을 잘 그렸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교내 미술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것은 물론, 학교 대표로 시 대회에 나가 상을 받기도 했다. 언니는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고, 인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언제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림도 그럭저럭, 외모도 그럭저럭. 운동신경은 0에 수렴했고, 공부도 언제나 중상위권을 맴도는 어디에나 한 명쯤 있을 법한 평범한 학생. 입학식, 졸업식은 고사하고 매주 한 번씩 있던 조회 시상식에서조차 이름이 불려본 적 없는 사람. 교우관계에 문제는 없지만, 반장이나 부반장을 맡을 만큼 두각을 드러내지 않는 학생. 사고 치지 않고, 문제 일으키지 않는 성실한 학생이지만, 그뿐이었다.     


서울 내에서도 이름 있는 명문 대학에 입학해, 입학 후에도 과 일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과 학생회에 소속되어 학생회 활동은 물론, 동아리 활동까지 훌륭히 해낸 언니.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나의 작문 실력을 높게 봐주신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경기도 소재의 대학에 원서를 넣어, 예비번호를 받아 2차 합격 발표 기간까지 기다려 겨우 입학한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성과였다.     


언니의 시골행을 반대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언제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던 언니가 굳이 안평 같은 시골에 들어가 재능을 썩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늘 주목을 받았던 언니가 그런 시골에 가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사진관 영업을 끝내고 일과를 마무리하며 청소했을 언니의 모습을 상상하며 사진관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카운터 한 구석에 위치한 포스기, 그 옆에 놓인 이 나간 머그잔과 그 안에 꽂힌 펜들. 메모지 한 묶음과 손때 묻은 노트 하나. 가지런히 정리된 모습이 꼭 언니답다고 생각했다.  

    

언니의 정리를 하기 위해 방문한 만큼, 물건들을 모두 치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울에서 안평까지는 거리가 꽤 있던 탓에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시간은 어느덧 두 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서둘러 정리하지 않으면 곧 해가 질 것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로 향했다. 하나하나 확인하며 정리해야 하는 카운터나 살림집의 짐은 뒤로 하고, 한데 모아 정리만 해두면 되는 기계 장치들부터 정리해 두고, 나머지 짐을 차근차근 정리할 요량이었다. 언니와 함께 살던 집에 이사한 이래로, 이사를 해본 경험조차 없어, 무엇부터 정리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하에는 촬영 장비들이 정돈된 채 놓여있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손님들의 사진을 찍었으리라. 늘 정리 정돈에 민감했던 언니답게, 장비 역시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전선 하나 엉킨 것 없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으며, 사용했을 길이보다 긴 선들은 길이를 맞추어 케이블 타이로 깔끔하게 묶인 채였다.      


기기들을 한데 모으고, 코드가 연결된 기기들은 코드를 뽑아 가지런히 정리했다. 언니가 평소 케이블 타이를 어디에 두고 쓰는지 알 수 없어 고무줄을 사용해 묶어 두었지만, 언니가 사전에 정리해 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관 촬영에 사용했을 기기들은, 방송국에서 오가며 보던 장비들과 비슷한 것이 많았지만, 도무지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펼쳐진 것들을 어떻게 집어넣는지 알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송국에서 음향 팀으로 일하던 친구라도 데리고 같이 올 걸 그랬나, 따위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어찌어찌 기기를 갈무리하고, 의자 등 자잘한 집기들을 한데 모아두고 나니 여섯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서울과 달리 시골의 밤은 빠르게 찾아왔고, 그제야 나는 이곳에 머무를 숙소를 잡아두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아니, 애초에 근방에 묵을 만한 장소가 있었나. 이곳까지 오며 호텔은 고사하고, 작은 여관마저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낮에, 그러니까, 주변 가게들이 문을 닫기 전에 근처에 여관이나 민박집 따위가 있는지 물어봐 뒀어야 했는데. 후회해 봤자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언니는 가게에 딸린 살림집에서 생활했다고 했다. 나는 언니의 살림집 미닫이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어쩐지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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