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전히 미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여전히 미생을 강요하는 사회)
- 여전히 미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여전히 미생을 강요하는 사회)
과연 중소기업, 영세기업보다 대기업이 더 대단한 곳일까? 지방대학, 전문대학 보다 수도권에 있는 대학이 더 뛰어난 아이들이 모인 곳일까? 사실 규모의 차이가 날 뿐 하는 일은 비슷하다. 영세기업에는 한 대 밖에 없는 생산설비가 대기업에는 그 보다 더 많이 갖춰져 있다는 차이만 있다. 대기업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회사 규모가 압도적으로 클 뿐이다. 대학 또한 학창시절 암기를 좀 더 잘해서 성적을 잘 받은 아이들이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 갈 뿐 그들이라고 해서 자기가 공부하는 분야에 흥미나 이해도가 더 높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사의 브랜드네임, 인지도 약간의 월급차이, TV광고 할 수 있는 회사의 능력, 광고 속 연예인의 지명도 따위를 보고 대기업을 선호한다. 세상이 이렇게 망가졌다. 자신의 적성과 행복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규모가 큰 회사들은 제품을 더 튼튼하고 좋게 만드는 방법을 알지만 일부러 고장이 잘 나도록 제품을 만든다. 프린터, 노트북, 장난감, 특히 스마트폰은 너무 쉽게 액정이 깨지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스마트폰 속도가 너무 심하게 느려진다. 제일 처음 이것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보다 수명이 더 짧아졌다. 튼튼하게 만들면 왜 안 될까? 정작 자기들이 먹고살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규모가 커진 그룹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룹이라는 허물을 유지하기 위해 소비자가 그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기업에 다니는 직원들은 개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미생’정도만 있어도 회사가 굴러가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 99%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그럼에도 완전하게 살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1%의 완생만 유지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미생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 곤란하다. 제멋대로 아이디어를 내거나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 회사는 과도한 업무로 미생들을 매몰시켜버린다. 걱정하지 마라. 당신이 지치면 언제라도 대체 가능한 미생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원래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존재다. 70억 인구 중에 대체가능한 사람이 존재한다면 내가 이 시대, 이 나라, 이 시기에 왜 존재하겠는가? 그런데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의지로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되었을까? 대체가능한 미생은 아주 간단히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대꾸하지 마’,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해’, ‘업무시간에 다른 일 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마’와 같은 말만 계속해서 들으면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기 싫어진다.
이것이 바로 그나마 20세기까지는 가능했던 대량생산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기계나 컴퓨터, 군대(전쟁)에나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러한 대량생산 사회가 서서히 종말을 향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량생산은 대량소비가 필요한데, 사람들이 나만을 위한 제품을 원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똑같은 제품, 똑같은 스타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마트나, 천 원짜리 가게, 홈쇼핑, 저렴한 쇼핑몰에 속아 필요한 것처럼 보여 제품을 구매했다가 그대로 버리거나 구석에 처박힌 것이 어디 한 두 번인가.
우리도 유럽처럼 자원의 낭비를 막아야 한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야 한다. 유럽은 플라스틱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대량소비 없이는 성립되지 못하는 대량생산 시스템은 깨어있는 의식으로 말미암아 개성 있는 사회로 변모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불경기는 경기 침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속지말자. 서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할 뿐 있는 사람들의 재산은 늘 증가해왔다.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들만 앞으로도 계속 지금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힘들게 대량생산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보다 자신의 개성을 찾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가운데 자신의 살길을 자연스럽게 찾게 될 것이다. 이것이 행복한 미래를 맞이할 방법이 아닐까?
그렇다면 개성이 중요한 시대에 자신을 브랜드화 시키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능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0에서 1을 만들어 내는 일, 즉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약 16년 동안 받은 적지 않은 교육을 받았다. 다만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활용해 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앞으로 사회는 지금과 같이 동일한 물건을 백 개, 천 개씩 똑같이 찍어내서는 발전할 수 없다. 이게 계속 유지 된다면 그런 물건과 같은 대접을 받는 인생이 될 뿐이다.
물론 대량생산 체제를 필요로 하는 나라들이 아직 많이 존재한다. 우리가 빈민국이라고 말하는 국가들은 안타깝게 이런 시스템이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값싼 노동자로 쓰임만 당할 뿐 그들 나라에 돌아가는 것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우리가 배운 지식을 우리끼리 경쟁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당신도 좋고 그들도 좋을 것이다. 대신 그들을 위한 물건을 만들면서 우리와 같은 대기업시스템을 정착시켜서는 안 된다. 그 나라 실정(문화)에 맞게 적용을 해야 한다. 현지인들이 스스로 생각을 하고 뭔가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대기업이 아닌 소상공인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해야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대량시스템에서 배워야 할 것은 0에서 전에 없던 0을 만들었던 근원만 배우면 된다. 단 대량생산 대신 소량으로 생산하고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가치에 맞는 제 값을 받는다면 굳이 많이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욕심을 버릴 필요가 있다.
0에서 1을 만들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머리가 좋은 사람도 아니며 고학력 보유자들이 아니다. 귀차니즘, 시간 많은 사람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었다.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일을 시도 했던 사람’이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를 했던 사람’ 이다. 스펙을 쌓는데 시간을 뺏기면 이런 능력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0에서 1을 만들 때 과거의 지식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오히려 안다는 생각이 새로운 생각을 방해한다. 정답사회에 익숙하다보니 ‘이건 이거잖아’만 할 수 있지 ‘이건 이렇게도 가능하지 않을까?’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도 시도해 본적 없는 일은 책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여태껏 ‘이건 이렇게 해야지’라는 생각과 지식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끝가지 해 본다’, ‘다양한 시각으로 생각(사고)을 한다’ 이런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런 자세를 지닌 인물들의 습관을 보면 ‘그럼 이렇게 해볼까?“가 생활화 되어있다. 어떤 난관이 와도 포기하지 않고 1% 가능성만 생각하며 또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도하는 사람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 99% 안 되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 살아도 “~처럼” 되어 질 뿐이다.
“아이구야, 안 그래도 살기 힘든데 그렇게까지 1% 가능성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렇게 되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누구나 처음에는 1%도 안 되는 가능성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불가능한 확률을 뚫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날 때 어머니 몸속의 좁은 사도를 지나 세상에 태어났다. 이때 우리 몸에는 약 1.5톤의 어마어마한 압력이 가해진다고 한다. 이것을 ‘퍼스트 트라우마’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첫 번째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살고 있다.
스페인에서 투우를 할 때 투우사가 감당해야 할 소의 무게가 약 1톤이라고 한다. 우리는 마치 두개골이 뒤틀린 것과 같은 엄청난 고통을 이기고 세상에 태어났다. 설마, 지금까지 살면서 두개골이 휠 만큼 지독한 역경은 없었을 것이다. 태어날 때 고통을 ‘10’이라고 한다면, 태어난 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9’ 이하의 고통이다. 그렇다면, 현재 모든 일은 내가 모두 뛰어넘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살면서 우리가 뛰어넘을 수 없는 문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태어난 일보다 더 힘든 일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아보다 강하다.
이시기를 지나 우리는 모두 유야기를 보냈다. 유아기의 모든 관심은 태어나서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던 일을 성취하는 데 집중한다. 걷기, 말하기, 몸 뒤집기, 스스로 배변하기, 등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모든 행동에 박수를 받고 인정을 받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름 꾀도 쓰지만, 모든 아이들은 남들이 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행동을 하면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장난치지 마.” “다른 친구들 보다 왜 이렇게 늦니?”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
엄마 뱃속에서 포기하는 방법을 익히고 태어나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어른은 유아기를 거치면서 개인의 개성은 무시당한 채 오로지 기존 시스템의 선두가 되는 것만 강요당한다. 나이 대에 맞는 정해진 커리큘럼과 관계없는 것들은 모두 포기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릴 때 포기할 것을 강요당한다. 이는 근성과 도전정신을 가진 우리에게 사회와 부모가 계속해서 포기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이다. 어른과 기업이 다투고 쉽고 말귀 잘 알아듣고, 고분고분한 사람을 찍어내고 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 역시 자녀들을 미생으로 키우고 있다. 이제 돌아보니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아이’는 그다지 좋지 않은 기득권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결과물인 듯하다. 얌전하고 말 잘 들었던 내 친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