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_한강
한강의 글은 여리지만 날이 서있다.
떨어져서 보면 가냘프다. 비구니의 손끝에서 하늘거리는 장삼소매 같아 보인다. 누구라도 겁 없이 다가간다. 가까이서 마주한 순간 알아 챈다. 그것은 본래 무림고수가 휘두르는 부드럽고 긴-찰랑거리며 날아가 급소를 노리는-연검(軟劍)이라는 사실을.
포근한 듯하여 품은 ‘문장'에 몸과 영혼이 성한 곳 하나 없이 베어져 흩어진다. 응축된 언어는 수만 번 숫돌에 벼려서 서슬만 남은 발골칼과 같다. 예리한 통찰은 역사적 사실을 냉철히 목도한 결과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사랑’이 깊게 깃들어 있다. 그래서 따뜻한 감촉을 가졌지만 지독히 시린 통증을 안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런 작품이다.
아니, 그곳뿐만 아니라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p.57
인선이 사고로 다치면서 시작되는 일련의 묘사는 읽는 것만으로 통증이 그대로 전달된다. 단어의 선택과 배치, 생생한 묘사가 어우러져 시각은 물론 촉각까지 깨운다. 환각통이 생길 정도다.
작품 속에서 은유로 표현되는 부분이 제법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경하가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 작업실로 향하는 여정이다. 보통 상황이면 아주 쉬운 길이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비행기로, 공항에서 마을까지는 버스로, 정류장에서 작업실까지는 산책하며 도달할 수 있는 쉽고 편한 ‘정해진' 길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경하의 ‘고난 길’은 4.3 사건의 현장에서 펼쳐진 ‘생존의 길’인 것 같기도 하고, 은폐되어 잊히고 있는 진실을 찾아가는 지난한 여정인 것 같기도 하다. 쉬운 길을 비정상적 환경이 방해하고 있는 현실을 비유한 듯 하다.
경하는 끝내 인선의 작업실에 도착한다. 활짝 열린 대문과 환한 불빛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작업실. 진실이 고스란히 묻혀있는 곳에 누군가는,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라고 예언하듯.
등장인물들도 상징적이다. 아미는 4.3 사건의 희생자. 아마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생존자. 인선은 희생자와 생존자의 가족. 경하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자리에 있다. 특히 경하는 작가의 내면을 투영하면서 동시에 4.3사건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 같다.
이런 은유의 연속선상에서 새(아마)의 죽음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의 비극은 경하 탓이 아니다. 경하는 선의의 구원자이다. 하지만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경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남의 고통을 공감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거울뉴런처럼 거의 유사한 고통을 경험한다. 경하의 고통이 부디 많은 사람에게 전이되길 바란다.
인선은 4.3 증언을 기록한 자신의 영화에 대해 “아버지의 역사에 부치는 영상시”라는 소개를 부정한다. 과거사로 치부되는 것에 대한 부정, 가족사로 축약되는 것에 대한 부정, 영상시라는 ‘낭만적 신파’를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4.3의 현재성과 지리적 보편성’인 것 같다. 4.3사건을 ‘변방에서 일어난 (한 번의) 우발적 사건’으로 평가하려는 시도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4.3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희생자, 생존자, 방관자, 목격자, 증언자, 그의 가족들, 가해자, 그리고 '우리' 등…, 수많은 등장인물에 학살, 대살, 방화, 암장, 방관, 정치, 반공, 빨갱이, 은폐, 왜곡, 유해, 발굴, 망각, 애도… 등의 사건이 혼재해서 한반도 전역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다.
‘양민학살', 네 글자로 축약된 단어로는 그 복잡하고 무거운 진실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이 작품은 소중하다. 어떤 역사서보다 그때의, 지금의, 앞으로 지속될 고통과 슬픔과 사랑을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4.3사건 희생자 가족들은 고통과 슬픔에 짓눌려 살아왔다. 공포와 불안은 일상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을 것이다.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시원하게 씻기지 않는 채 응어리가 되어 굳어 버렸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증언되는 당시의 범죄들은 읽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이나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 자행된 살육은 인간이기를 거부한 종족의 짓이라 봐야 한다. 당시 권력에 눈먼 자들이 고안한 '빨갱이 망령'은 현재까지도 이 땅에 깊이 스며 있다. 참담한 현실이다.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 살 이모만 당숙네에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다음날 소식을 들은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 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 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 봐,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 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 뺨에 눈이 쌓이고 피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p84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p134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다. 작가가 시인이었음을 증명하는 문장이다. 인간세상의 원리를 세줄로 축약한 것 같다.
삶은 견디는 것이다. 열망과 ‘한’같은 이루고 풀어야 할 것들, 그리고 궁극의 지향점-사랑 같은 것-들이 없다면 어떻게 견딜 것이냐는 것이다.
한강은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는 작가의 친정이다. 작가의 작품들이 난해하다는 평을 받곤 하는데, 연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소설이 아주 긴 시처럼 느껴진다. 문체가 함축적이고 간결하며,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문장이 많다. 이 소설은 외탁했다.
프랑스어 번역본이 ‘제주 방언’의 뉘앙스를 어떻게 살렸을지 무척 궁금했다. 작품 속에서 제주 방언은 핵심 역할을 한다. 시공간적 특수성이 작품의 주제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제주 방언이 가지는 위치는 등장인물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어떻게 풀어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할 때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예상했다.
마침 책을 번역한 최경란의 인터뷰로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다소 의외였다.
제주도 방언의 번역에 대해 최경란은 “방언은 깨끗이 잊어야 한다”며 “방언은 고유한 맛이 있는데, 제주 방언의 경우에도 특별하지만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길 방법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예를 들어 프랑스 남쪽의 방언으로 옮긴다든가 하는 시도가 10여 년 전에 있었다”면서도 “그러나 프랑스의 방언, 예를 들어 마르세유 방언으로 옮긴다면 그 감정은 완전히 달라진다”라고 말했다...이어 “프랑스 독자가 읽기에는 다른 억양으로 다른 감성으로 읽힌다”며 “아예 새로운 방언을 창작해 내지 않는 한 기존의 방언으로 덮어씌우는 것은 불가능한데, 어정쩡한 것을 만드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잊는 것이 낫다”라고 강조했다. _ 동아일보 인터뷰 중
번역가의 설명이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제주방언의 역할은 독자에게 ‘타임머신'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독자를 그 당시 그 장소로 데리고 가서, 현장의 참혹함을 전해주는 핵심적인 장치가 제주방언이다. 번역본에서 완전히 제거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상을 받았다는 것은 이 작품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높은 수준에서 표현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될 듯하다. 대단한 일이다.
231쪽부터 길게 이어지는 노파의 증언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노파는 목격자이자 생존자였으나, 살아가는 동안 피해자와 같은 아픔이 몸에 배게 되고, 가해자가 가질만한 죄의식과 희생자에 대한 부채의식을 동시에 감내해야 한다. 지은 죄는 없는데, 단지 그때 거기에 있었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 듯해 안타깝다.
엎드려 고개를 숙이기 전에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이것을 보고 싶은가. 병원 로비에 붙어 있던 사진들처럼, 정확히 보지 않는 편이 좋은 종류의 것 아닐까.
p256
4.3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에둘러 표현한다. 불편한 것이 시야에 들어오면 초점을 뭉개는 사람들. 진실을 끝내 외면하는 사람들. 혹은 진실에 관심 없는 사람들. 이 소설을 곱씹어 읽는다는 건, 초점을 뭉개지 않고 진실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잘려나간 인선의 손가락 마디를 똑바로 응시하지 않은 채 보내는 위로는 허망한 자기변명이다. 우리의 초점 잡힌 시선은 상처를 향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 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p316
작가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라고 책 말미에 썼다. 등장인물 모두에게 내재된 ‘지극한 사랑'이 없었다면 고통과 슬픔, 진실을 향한 고행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란 뜻이리라.
작가가 언급한 사랑의 뜻과 결이 닿은 문장이 아닐까 생각해서 같이 적어본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p.223
'닿을 수도, 품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랑'에 대한 비애를 품은 작가. 그가 ‘지극한 사랑'을 파괴한 것들에게 날릴 - 글로 빚은 아름답고 예리한 - 비수를 독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PS. 노벨문학상을 떠올려본다. 한국 작가에 대한 언급이 드물어졌다. 여러 이슈로 인해 관심도 멀어졌다. 그런데 혹시 떠올려본다면 한강이 제일 가깝지 않을까?
시대에 부합하는 주제의식과 문학적 성취도, 인지도 등을 따진다면 그렇다는 기대다.
그럴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