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이다. 버스를 타고 가는 이 시간.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랜만이지도 않은데 이 상황, 이 기분 왜 이렇게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인지 모르겠다. 뿌연 미세먼지로 또렷이 보이지 않는 도봉산, 겨울을 뚫고 나오는 인도의 잡초들, 아침 운동을 즐기며 중랑천을 걷는 사람들, 바쁘게 일상을 준비하는 직장인들, 그리고 버스 속에서 간만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나와 도로 양옆을 가득 메운 노오란 개나리들, 참 좋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이 시간, 내가 좋아하는 시간 중의 하나이다. 버스 뒤쪽에 앉아 바깥 구경을 하고, 때론 잠도 자고, 앞사람 뒤통수를 보면 저 사람은 무얼 하는 사람일까? 궁금증도 가져보고. 꽁냥꽁냥거리는 커플을 보며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라며 약간의 부러움도 가져보고, 아이를 둘러업고 양손에 짐을 가득 든 여자를 보며 새삼 엄마의 위대함을 깨닫기도 하고, 구부정한 허리로 힘겹게 버스에 오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건강하게 늙어야 할 텐데 걱정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참 많은 생각을 했는데 그땐 몰랐다. 살짝 연 창문으로 봄꽃 내음이 살랑거린다.
20-30대 때 나의 유일한 취미는 버스 타고 돌아다니기였다. 그런 취미가 어딨나며, 그게 무슨 취미냐며 티 나는데 티 안 나는 척 친구들은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나에겐 그랬다. 주말이나 이직 준비 중으로 잠깐 짬이 날 때면 어김없이 버스와 데이트를 했다. 종점 근방 우리 집에서 종점 근방 강남 교보문고를 자주 갔다. 독서를 좋아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책 구경만 하고 강남 한 바퀴 돌고 다른 노선으로 다른 버스를 타고 집에 온다. 어떤 날은 아무 버스나 타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낯선 곳에도 간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내려 또 다른 버스를 타고 또 다른 낯선 곳으로 향한다. 가끔은 낯선 곳이 살짝쿵 두렵기도 하지만 그 두려움은 고개도 내밀 수 없을 만큼 설렘과 즐거움이 더 크다. 그렇게 도착한 새롭고 낯선 곳은 가끔은 삭막하기도 가끔은 신선하기도 하다. 공원이 있는 곳도 있고, 건물만 보이는 곳도 있고, 시골스러운 곳도 있고.. 오늘은 어떤 곳에 다다를지 늘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 불확실성 속에 두근대는 설렘이 그땐 좋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선 바깥 구경을 하며, 이런 곳에 이런 곳도 있구나. 와 여긴 너무 좋다를 연발하며 머릿속에, 눈 속에 그곳을 저장했다. 누가 들으면 할일없는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에서야 간절히 느끼는 독서의 중요함도 건강의 중요함도 모르는 혈기왕성한 시절이라 별 취미 없이 그렇게 버스와 열렬한 연애를 즐겼다.
지금도 버스를 타면 가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모든 곳이 기억나진 않지만 나름 바쁜 사람들로 가득했던 버스 속의 북적임과 버스 창문으로 보이던 무한한 풍경의 전시들, 그리고 그것들을 온전히 누렸던 나만의 시간들... 즐거웠을 때도 슬펐을 때도 화가 났을 때도 나는 버스를 탔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나는 그저 지금 내가 누릴 수 없는 여유로움과 힐링 그 자체로만 기억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온전한 나만의 충전의 시간. 지금 이 버스 속에서 그때를 기억하며 잠시나마 충전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