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마음

네스프레소 룽고 잔

by 한낱


오늘 싱크대 개수대에는 아껴둔다고 평소에 잘 쓰지 못하는 네스프레소 룽고 잔이 나와 있다. 손잡이가 막혀있는 독특한 유리잔이다. 에스프레소 잔보다는 크고 머그잔보다는 작은 네스프레소의 시그니처 잔이라고나 할까. 나는 오랫동안 ‘네스프레소 시티즈’를 사용하고 있다. 나 같은 MD(소위 말하는 ‘굿즈’) 덕후가 네스프레소 순정 굿즈 정도 가지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룽고 잔에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일곱 살 때의 일이다. 딸의 절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사건은 일어났다. 그 친구네는 이제 막 새집으로 이사했다. 거실 벽과 바닥은 고급스러운 대리석 느낌이 나는 폴리싱 타일로 마감하고 방들은 깨끗하게 도배했다. 워낙에 그 집 엄마(내 친구이기도 하다)가 깨끗하고 단정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집이 얼마나 반질반질 깔끔한지 몰랐다. 우리는 그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이 동네 같은 평수 중 ‘동급 최강’이라며 부러워했다.


그 집에서 딸과 친구는 방에서 놀고 있고 우리는 우리 대로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너무 조용하길래(아이들이 조용하면 무섭다) 엄마의 날카로운 촉으로 방 문을 열었다. 바로 그때 딸이 벽 한가운데에 볼펜으로 아주 크게 ‘사린’이라는 글자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오……마이…… 갓!!!!!! 정말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집에서도 벽에 낙서를 하지 않던 아이였다. 도대체 왜 !! 새로 예쁘게 도배해서 이사한 집 벽에다 낙서를 하고 있냐고!! 이 깨끗한 집에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정말 정신이 잠깐 나갔었다. 어쩔 줄 몰라 급히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하고 딸아이에게 화내고 혼냈다. 그 집 엄마는 괜찮다고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는가.


이 상황에서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앉아서 이야기 나눌 수가 없었다. 얼른 짐을 챙겨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끊임없이 혼내고 다그치며 이유를 물었다. 어떻게 우리 아이가 남의 집에 이렇게 큰 민폐를 끼칠 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되었던 것 같다. 한참을 혼내면서 도대체 이유가 뭔지 물었을 때 딸은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 이사한 집을 예쁘게 꾸며주고 싶었어.” 그러면서 엉엉 우는 것이었다. 속내를 알고 나니 그렇게 다그치고 혼낸 것이 미안했다. 자신의 잘못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고 예쁘게 꾸며주고 싶었다는 마음 또한 이해는 되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이름은 ‘서린’이다. 새로 도배한 남의 집 벽에 낙서한 것도 모자라, 한글을 아직 완벽하게 깨치지 못해 이름까지 틀리게 쓴 것이다. “이모가 미안해, 서린아.”


그 일 이후, 도배 집에 찾아가 도배하는데 얼마가 드는지 알아보았다. 방 전체를 도배하기엔 큰일이고 한쪽 벽만을 위한 도배비를 내밀기에는 어정쩡한 금액이었다. 결국 그녀에게 백화점 상품권을 건넸다. 돈으로는 절대로 받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나는 너무나 미안해서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이대로 우리 사이 어색해지는 건가.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라고 생각했다. 맘 카페에서 아이 친구 찾는 댓글로 인연이 되어 네 살 때부터 친하게 지내오던 친구였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아이 친구를 만들려고 만나 엄마에게도 친구가 생긴 바른 예였다. 둘은 만나자마자 취향이 비슷하다는 걸 알았다. 끌고 나온 유모차까지 똑같은 거였으니. 그런 친구와 멀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저지른 일이 있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깔끔한 성격에 얼마나 속상했을까. 생각만 해도 이불 킥이다. 돈으로 해결할 마음은 아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참으로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며칠 후, 그녀가 같이 네스프레소 부티크에 가자고 했다. 우리는 같은 네스프레소 시티즈 유저였고 한 번씩 백화점에 있는 네스프레소 부티크에 커피 캡슐을 사러 가곤 했다. 새로 나온 캡슐 커피도 시음하고 굿즈 구경도 했다. 나는 매번 저 예쁜 룽고 잔을 사고 싶다는 생각에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하고 돌아왔었다. 부티크에 들어서서 각자의 캡슐을 사고는 그녀가 룽고 잔 세트를 샀다. “와~ 드디어 사는 거야?” 내가 더 좋아하며 부러워했다. 누군가 물건 사는 걸(이라고 쓰고 ‘지르는 걸’이라고 읽는다) 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니까. 계산을 치르고 가게를 나서면서 그녀가 룽고 잔이 든 쇼핑백을 나에게 내밀었다.


“너 주려고 샀어. 받아.”


“무슨 말이야? 이걸 왜 나 줘?”


“너한테 상품권 받고 이거 사주고 싶었어. 예전부터 갖고 싶어 했잖아.”


“아냐 ~ 절대 받을 수 없어. 도배 못 해줘서 대신 준 거야. 너무 미안해서 못 받아 ~”


몇 번을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받고 말았다. 정말 나의 뻔뻔스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 미안하고 너무 고마웠다.


그녀는 얼굴 붉히며 돌아서버려도 할 말 없는 대형 사고를 훗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아직도 그녀의 집 벽에 크게 쓰여있는 ‘사린’을 보며 딸과 웃는다는 이야기를 특유의 기분 좋은 목소리로 전해준다. 모두들 맘 카페에서 사귄 친구가 이렇게 절친이 되는 건 힘들다고 했다. 서울 사람은 다 깍쟁이라고 생각하던 부산 사람인 나는 그녀가 보여준 반전의 모습에 홀딱 반해버렸다. 쭉 우리는 절친이다(그녀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단정하고 똑똑하고 깔끔한 서울 여자인 그녀는 개그맨 신동엽 뺨치는 순발력과 재치로 함께하는 사람들을 항상 기분 좋게 한다. 너그러운 마음과 여유로운 태도로 사람들을 대한다. 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매력에 가까이하고 싶어 하고 함께 어울리고 싶어 한다.


이 일을 겪으며 ‘나라면 어땠을까.’ 많이 생각했다. 나는 과연 웃으며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넓이를 가졌나. 장담할 수 없다. 돌발 상황이었고 친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 순간은 표정 관리가 안 됐을 것 같다. 이후 나는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그녀의 행동을 떠올린다. 어떤 일이든 좋게 좋게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됐다.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이 룽고 잔을 어떻게 휘뚜루마뚜루 쓸 수 있단 말인가. 고이고이 간직하며 아껴 쓰고 있다. 씻을 때도 특별히 조심조심. 이 잔이 설거지거리로 나와 있는 것을 보니 대단한 손님을 접대했든지 뭔가 기분 전환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컵 욕심 많은 내가 그 정도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잔이 바로 이 네스프레소 룽고 잔이다. 그녀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