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의 최대 장애물

애지중지 사은품 브라운색 컵

by 한낱

축 늘어져 있다가 오후 3~4시가 되면 벌떡 일어나 거실을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한다. 늘어놓은 책과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민다. 거실과 공부방을 치우고 혹시 모르니 화장실 청소도 한다.


퇴근한 남편이 한마디 한다.


“오늘 왜 이렇게 깨끗해? 아……학습지 선생님 왔다 가셨구나!”


예리한 사람. 그렇다. 오늘은 딸아이의 방문 학습지 선생님이 오신 날이다.


학습지 수업이 있던 날에는 반드시 맥심 모카골드 커피믹스를 사고 받은 브라운색의 작은 컵이 설거지통에 담겨있다. 사은품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내가 이 컵으로 6인조 세트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커피믹스를 마셔야 했던가.


어느 날 마트에 갔더니 인스턴트커피를 파는 코너에서 아주 짙은 브라운색에 손잡이가 달린 작은 컵이 사은품으로 붙어있는 커피를 봤다. 커피믹스 한 잔, 딱 맛있게 마실 수 있는 크기. 완벽하게 내 취향의 색과 모양이었다. 갖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한 통을 사들고 와서 뜯어 사용해보니 더 마음에 쏙 들었다. 또 꿈틀댔다. 이건 세트로 만들어야 해. 손님이 왔는데 누군 이 컵에 주고 누군 저 컵에 줄 수는 없잖아? 적어도 6개는 돼야 해. 4개로 세트를 만들었다가 5명이나 6명이 오면 어떡해? 별별 핑계를 다 대며 컵 수집에 들어갔다.


남편과 나는 거의 아메리카노만 마신다. 잘 마시지도 않는 걸 컵 때문에 계속 사냐고 불평하던 남편의 말에 굴복하지 않고 이 예쁜 브라운색의 컵을 하나씩 손에 넣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희열을 느꼈겠는가.


처음에는 학습지 선생님이 왔을 때 캡슐 커피 기계로 내린 커피를 드렸다. 화장실 문제나 너무 많은 집에서 마시기 때문에 보통은 커피를 남기거나 잘 안 드신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러나 우리 선생님은 베테랑 선생님. 아주 거리낌 없이 말씀하셨다. “어머님, 저는 이런 커피보다 다방 커피가 더 좋아요~호호.” 드디어 내가 그동안 열심히 모아둔 브라운 컵이 다른 사람 앞에 데뷔할 때가 왔다. 그때부터 학습지 선생님이 오시면 늘 그 컵에 커피믹스를 맛있게 타서 내 드렸다. 그럼 남기지 않고 끝까지 마시고 가셨다. 왠지 모를 뿌듯함에 그 어떤 명품 컵보다 제 할 일을 잘 끝낸 컵을 부지런히 씻는 것으로 칭찬해 줬다.


나는 사은품에 약하다. 특히나 컵이 붙은 경우에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우리 집에는 각종 브랜드에서 사은품으로 나온 맥주컵이며 커피잔이 있다. 사은품이기에 꼭 한 개씩만 들어가 있다. 오지도 않는 손님을 위해, 남편과 둘이 같이 마실 때를 대비해야 한다며 두개 이상을 갖춰야 하니 두 세트 이상을 사게 된다.


좋은 향기가 나는 ‘호가든 맥주’는 반드시 조금 따르고 나서 살살 돌려 가라앉아 있는 풍미를 마지막까지 끌어모아 딱 맞게 따를 수 있는 호가든 전용잔에 마셔야 제대로 마시는 기분이 든다. 이름도 제대로 잘 모르는 수입맥주 전용잔도 많다. 한창 수입맥주가 유행할 때 어찌나 예쁜 잔들이 새초롬하게 딱 하나씩만 들어있던지. ‘나 같은 호구가 참말로 많구나.’ 하며 꾸역꾸역 카트에 집어넣었다. 마케팅이나 홍보하는 사람들은 나 같은 소비자만 있다면 밥 굶을 걱정은 없을 것이다. 밥이 웬 말이냐. 억대 연봉까지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각종 카페의 MD인 커피잔들도 여지없이 우리 집 수납장에 빼곡하게 들어있다. 갑자기 고백하자면 나는 한때 스타벅스의 노예였다. 노예는 당연히 스타벅스의 각종 굿즈를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 발품을 팔고 인터넷 검색을 한다.


여름에 집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실 때는 역시 스타벅스 ‘TO GO’ 유리컵에 마셔야지. 스타벅스의 테이크 아웃 잔처럼 가운데에 커다란 세이렌 마크가 있고 눈금이 그려진 두껍고 큼직한 유리컵이다. 이 유리컵이 내가 살던 곳 주위의 매장에서는 모두 품절이었다. 결국 지방으로 출장 간 남편에게 부탁해서 샀다. 동네 친한 언니와 같이 찾아다니면서 ‘구하기 힘든데 한 개만 살까’ 어쩔까 하며 나온 대화 속에서 언니는 이런 말을 했다. “야, 깨질지도 모르는데 한 개는 아니지. 무조건 두 개 이상은 있어야 된데이.” 아. 이 언니는 나보다 한 수 위구나.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투고 유리컵을 네 개나 가지게 됐다. 뜨거운 여름에 누군가 우리 집을 찾는다면 나는 시원한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늘 이 컵에 낸다.


얼마 전부터 미니멀리즘이 현대인들의 생활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물건만 남기는 것. 나는 그 문화에 따라가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국 맥시멀리스트로 살고 있다.


적지 않은 수납장에 물건이 차고 넘친다. 버려도 버려도 어디선가 끝없이 나온다. 언제 이렇게 많은 물건들을 사다 놓고 수납장 곳곳의 구석에 처박아 놓은 건지. 정리하다 보면 쓰지도 않은 새 물건은 당연히 있고, 집에 있는 걸 또 사놓은 것도 있다. 나는 물욕은 가졌지만 ‘정리욕’은 없다.


다행히 남편은 정리욕이 많아서 한 번씩 날 잡아 정리를 한다. 그러면서 사은품으로 받은 컵들을 다 버리자고 했다.


“내가 어떻게 모은 건데. 아까워서 안 돼.”


“제대로 돈 주고 산 컵도 못 쓰고 있는데 사은품으로 받은 것들까지 떠받들고 살 수는 없다아이가.”


남편의 주장도 일리 있어 계속 망설였다. 여기서 정리하지 못한다면 나는 사은품 개미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끊임없이 본품보다 사은품에 정신이 팔려 닥치는 대로 모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 정리하자. 더 이상 물건에 의미를 두지 말자.’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 어느새 사은품이 정리된 자리에는 또 다른 사은품이 쓰임 받기 위해 조용히 앉아 있다. ‘기다려, 곧 데뷔시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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