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형 싱크대, 위치 바꾸기 1인 시위
설거지하고 돌아서면 밥 먹을 시간이고, 밥 먹고 나면 또 설거지거리가 쌓인다. 뫼비우스의 띠인가. 끝없이 돌아가는 설거지 사이클.
음식 만들기를 후딱후딱 해내지 못하는 나는 식사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다. 밥 먹을 때는 이미 지쳐있다. 너무 지쳐 밥을 먹기 싫을 때도 있다. 그런데 밥까지 먹고 나면 곧바로 식곤증이 오는 타입이라 몸을 움직이기도 싫을 만큼 피곤해진다. 피곤한데 벽보고 벌까지 서야 하다니.
결혼하기 전부터 싱크대의 개수대가 벽을 향하고 있는 구조가 너무 폭력적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나라 가정의 주방은 대부분 벽 쪽에 수도꼭지가 있다. 식사를 하고 나서 다들 배 두드리며 일어나 거실 소파에 앉아 있거나 자기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때 누군가는(주로 주부) 벽을 보고 서서 설거지를 해야 한다. 설거지하는 사람을 신데렐라나 콩쥐가 된 기분이 들게 하는 그 구조. 그게 늘 못마땅했다.
식사 준비한다고 힘들었는데 설거지까지 혼자 묵묵히 뒤돌아 해야 하는 건가. 그래서 주방용 TV도 나오고 식기세척기도 나왔을 것이다. 주방용 TV는 대부분 공중파 방송이나 라디오만 틀 수 있다. 그나마 주방의 더운 열기나 수증기로 금방 고장이 난다. 고장 나면 고치기도 귀찮고 은근히 수리비가 많이 든다. 식기세척기도 써봤다. 이런저런 불편함과 불만족으로 방치하고 그냥 냄비 수납으로 쓰이고 있다(식기세척기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딸아이가 어릴 때 많은 육아서를 읽었다. 각종 TV 부모 특강도 챙겨 보고 현장 강의도 들으러 다녔다. ‘엄마는 처음이라……’ 머리를 긁적이며 부모 공부를 해야 했다. 책이나 강의에서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하는 말이 “엄마가 집안일을 할 때 아이가 부르면 손 놓고 즉각적으로 아이에게 반응하세요.”라는 말들이었다.
이 이야기들을 들으며 처음에는 ‘아, 그렇게 해야 좋은 엄마구나.’ 하는 생각에 노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전문가들은 과연 자기 손으로 살림을 하며 아이를 키운 게 맞나?’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이들은 항상! 언제나! 늘! 한창 손에 비눗물을 묻히고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엄마!” 하며 애타게 부르거나 옷을 잡아당기며 무언가를 요구한다. 그럴 때면 ‘아, 이거 하나만 씻으면 되는데, 조금만 더 씻으면 되는데.’라는 생각에 즉각적으로 손을 놓지 못할 때가 많았다. 아니,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이럴 때 엄마가 등을 돌리고 설거지하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엄마의 얼굴을 보여주며 설거지를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굳이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도 아이의 눈을 보며 아이가 원하는 것을 귀담아 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괜히 개수대 위치에 핑계를 대 본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집을 짓고 살지 않는 한 지어진 집에 들어가 살아야 한다. 새로운 아파트의 모델하우스가 오픈할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여다본다. 요즘 주택 트렌드는 어떤가, 무슨 새로운 기술들이 들어왔나, 맞바람 치는 구조인가, 여기저기 꼼꼼히 둘러보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번쩍번쩍한 새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해도 개수대는 늘 벽에 딱 붙어있다. 아쉽다. 요즘 유행하는 ㄱ자, ㄷ자 싱크대의 개수대가 앞을 보게 설계할 수는 없을까? 가족들이 보이는 곳, 적어도 거실이 보이는 쪽으로. 아니 최소한 선택이 가능하게라도.
이제 주방 구조 설계가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몇십 년 전부터 남성 설계자들이 만들어 놓은 설계도로 짓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개수대가 오픈되어 있으면 지저분해 보여 싫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문가들이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얼마든지 심미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혁신적인 구조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족을 바라보는 구조의 개수대를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냥 나는 설거지할 때 혼자 벽보고 하는 것을 싫은 사람일 뿐이다. 나 같은 사람들이 또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많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연대를 만들고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해야 하나? “개수대 방향을 바꿔 달라! 바꿔 달라!” 이러다 민주설거지당까지 만들겠다. 웃음만 나온다.
그저 설거지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나 고민이 없는 우리 주거 문화의 무신경함이 싫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