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빌트인 가전의 함정
이번에는 설거지를 하지 않고 싱크대 개수대가 꽉 차도록 그릇을 모아두었다. 오랫동안 냄비 수납장으로 쓰고 있던 식기 세척기의 제 기능을 찾아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식기 세척기 예찬론자로 오래전부터 식기 세척기를 사용해 왔다. 이전에는 싱크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어 바로바로 그릇을 넣을 수 있는 6인용짜리를 사용했다. 새로운 집에 12인용 식기 세척기가 깔끔하게 빌트인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사 오면서 예전 것은 처분했다.
확실히 12인용 식기 세척기는 넉넉했다. 넣어도 넣어도 우리 세 식구가 사용한 흔적들을 충분히 소화해 냈다. 한동안 만족스럽게 사용하다가, 어느 날 물비린내가 나는 것이 너무 거슬렸다. 스팀으로 건조한 후 배수구에 고여 있는 물 때문인 것 같았다. 또한 빌트인 식기 세척기는 싱크대 개수대와 조금 떨어져 있어 그릇을 옮길 때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처리하는 것도 귀찮았다. 한 끼 나오는 식기의 양으로 12인용 식기 세척기를 돌리는 것은 조금 낭비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차츰 사용 빈도수가 줄었고, 마침 쓰던 세제도 똑 떨어졌다. 더 이상 세제를 구매하지 않았고 결국은 냄비 수납장으로 쓰게 되었다.
일이 바빠져 설거지하는 것도 밀리고 힘도 들어 허덕이고 있을 때 문득 생각이 났다. ‘아니, 저 멀쩡한 식기 세척기를 놔두고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다시 식기 세척기를 가동할 생각에 세제를 찾기 시작했다. 원래 쓰던 세제보다 더 좋다는 블록형 고체 세제를 찾아냈다. 무려 해외 직배송한다고 했다. 심지어 125개가 들어있는 대용량이었다. 그때부터 마음이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세제가 도착하기 하루 정도 전부터는 설거지거리를 일부러 방치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차피 식기 세척기 이모님이 다 해결해 줄 텐데 뭐.’
드디어 세제가 도착했다. 개수대에서 물이 흐르는 그릇을 하나하나 식기 세척기에 옮겨 넣고 따끈따끈한 세제 한 알을 집어던졌다. 룰루랄라 전원 버튼을 누르고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다. 시원스럽게 웅웅 거리며 돌아가야 할 물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액정 표시 창에서 불길한 문자만 깜박거렸다. 뭔가 빠졌나? 혹시 수도 밸브가 잠겼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몇 번이고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결국 포기하고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 AS 신청을 했다. 다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릇들을 하나하나 개수대로 옮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놔둘걸.’ 어떻게든 조금 더 편해 보려고 애썼던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뭐, 다행히 내일 기사님이 오신다니까. 괜찮아.
기사님이 오셔서 여기저기 살펴보고는 부속품이 녹았다고 했다. 고치는데 수리비가 꽤 많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도 뭐 계속 쓸 거니까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지금 고쳐도 몇 개월 후에 다른 중요 부품이 고장 날 거예요. 그건 부품이 단종돼서 더는 고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수리하지 않는 게 나을 거예요.”
“네?”
“아파트 빌트인 제품들의 부품이 이제 더 안 나와요. 비슷한 시기 아파트들이 다 그래요.”
‘아니, 어쩜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지?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파트의 빌트인 가전제품의 부품을 단종시켜 버리면 그 가전제품들은 어쩌란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집을 한 번 지으면 사람이 적어도 10년 이상은 살지 않나? 10년이 뭐야, 2~30년도 기본이지. 요즘은 재건축 허가도 30년 이상 지나야 나오는데. 가전제품이 고장은 날 수 있다 쳐도 부품은 계속 만들어 수리는 가능하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독립적인 제품들도 아니고 저렇게 붙박이로 박혀 있는 식기 세척기가 부품이 없어 수리할 수 없다니.
빌트인 제품의 부품 단종 문제는 식기 세척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에어컨도 환풍기도, 주방 TV도, 중앙제어장치도. 뭔가 편의를 위해 많이 들어가 있을수록 그 수만큼 많은 문제는 생겨났다. 처음에 편리했던 기능들이 지금은 골칫덩이가 되어 버렸다.
새 아파트들의 으리으리한 구성의 최첨단 옵션들을 보면서 침을 흘릴 때도 있었다. 그런 최첨단 옵션 빌트인 제품들도 시간이 지나니 잔고장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AS를 받을 때 늘 듣는 이야기는 ‘빌트인 제품이라 수리가 힘들어요’, ‘부품이 없어요’,’될지 안 될지 모르겠어요’였다.
너무 빠른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기능이 담긴 제품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소비해야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비해야만 하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내가 식기 세척기를 무조건 사용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기존의 식기 세척기를 떼어버리고 새 제품을 넣어야 했겠지. 제조사에서 고쳐 쓰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말이다. 살 때는 내가 ‘갑’인 것처럼 굴지만 사고 난 후에는 ‘을’이 되어 버린다.
식기 세척기 이모님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몇 가지를 배웠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구나. 있을 때 실컷 누리자. 덤으로 오는 것에 큰 기대는 하지 말자. 설거지는 바로바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