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판 DNA

by 한낱

유난히 긴 장마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토요일, 딸아이는 친구와 오래전부터 놀기로 했다며 굳이 나가야겠다고 고집했다. 남편은 ‘그럼 야외는 위험하니 실내 쇼핑몰에서 놀아라’며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오늘 같은 날 어디를 나가냐’고 난리 쳤겠지만 어차피 싸워봤자 기분만 상할 뿐 황소고집을 꺾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남편과 딸의 협상 과정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결국, 협상은 큰소리 나지 않고 잘 끝났다.


“나 돈 없는데 용돈 좀 주세요.”


이미 이번 달 용돈은 다 썼지만 중학교 들어가서 새로 사귄 친구와 밖에서 논다고 하니 용돈을 따로 조금 더 주려고 했었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카드 좀 써보고 싶다. 카드 좀 주면 안 돼?”


“뭐라카노. 카드는 원래 빌려주고 하는 거 아이다.”


그럼 그렇지, 좋게 끝날 리가 없지. 용돈을 좀 넉넉히 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의외로 남편이 자기 카드를 주라는 것이다. 뭘 썼는지 문자가 오니까 오히려 더 안심이라면서. 카드는 분실 위험이 있으니 잘 보관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며 보냈다.


남편과 나는 간단히 장을 봐오고 정리하고 영화 한 편을 보며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10,900원이 찍혔는데 뭘 먹은 거지?”


“‘두끼’에서 떡볶이 먹나 보네.”


“배라(배스킨 라빈스)에서 4000원, 27,900원 연속으로 두 번 찍혔는데 뭘 산 거지?”


“아니 배라는 그 안에 없잖아. 걸어 나와야 되는데 새로 산 하얀 운동화를 안 신고 아껴두다가 왜 굳이 오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에 신고 가서 밖으로 나갔대?” 솔직히 배라에서 두 번 문자 온 것보다 흰 운동화가 얼룩지는 게 더 신경 쓰였다.


비가 김장철 배추에 소금 뿌리듯이 후드득후드득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오는 날, 외식도 무리여서 주방으로 출근했다. 주섬주섬 싱크대 정리하며 저녁 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딸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거 샀엉 헤헤” 사진 하나가 내 휴대폰으로 전송되었다.


“뭔데?”


“배라 방탄!! 에디셔언!”


이게 27,900원의 정체였다. 카드 한 번 써보고 싶다고 해서 카드를 손에 쥐어줬더니 저런 간 큰 짓을 했다. 아이돌 컬래버레이션 상품을 사는데 3만 원쯤 우습게 써버리다니. 한 번쯤 사도 되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통 큰 딸은 그냥 훅 질러버렸다.


싱크대 볼에 남아 있는 몇 가지들을 씻으며 딸의 소비 규모와 패턴을 가만가만 생각해 보았다. 언제부터였지? 결국 생각의 끝에서 나와 남편의 ‘기간 한정’, ‘지역 한정’ 판에 약한 모습을 만났다. 여행을 가면 꼭 그 지역에서만 살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산다.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생활을 하며 문득문득 그곳에서의 추억을 느끼고 싶다는 이유로 작은 소품들을 즐겨 산다. 어떤 상품이 기간 한정으로 나오면 나중에 못 사게 될까 봐 얼른 사야 했다. ‘나중에 사야지 하면 품절이니라’라는 말로 망설이는 남편에게 ‘뽐뿌질’하곤 했다. 유명인이나 유명 브랜드와의 콜라보는 더 말할 것 없었다(과거형입니다).


딸은 아주 아기일 때부터 우리 부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고 자연히 뇌에 각인된 것이다. 엄마 아빠가 ‘기간 한정, 지역 한정’에는 너그러운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을 살 때는 더 당당하게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 소비 패턴이 교육상 나쁠 것 같아 저지하곤 했지만 함께 여행을 가거나 물건을 살 때면 어김없이 나도 모르게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된다. 수학여행이나 연수 후에 사 온 기념품들을 늘어놓고 오히려 우리가 품평회를 하기도 했다. “응, 이건 여기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거네. 잘 샀어” 혹은 “이런 건 어디든 흔하게 있잖아. 이런 건 사 오면 안 돼”.


카드도 손에 쥐어졌겠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콜라보가 눈앞에 있겠다, 엄마 아빠는 한정판에 너그럽다면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3만 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역시 설거지할 때는 브레인스토밍이 마구 일어난다. 집에 오면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지. 그런데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나? 나도 이제부터는 기간 한정이나 지역 한정에 목매지 말아야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


집에 돌아온 딸은 오자마자 나에게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소리를 했다.


“엄마도 BTS 팬이면 안 돼? OO이 엄마는 OO이랑 같이 BTS 팬이라서 뭐 사달라고 하기도 전에 이미 주문해 놓는대.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럼 너도 엄마가 좋아하는 정세랑 작가나 김초엽 작가 책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고 그러자. 포디콰(포르테 디 콰트로-크로스오버팀) 노래 같이 듣자.”


“아니, 미안해.”


이겼다. 오랜만에 딸이 순순히 승복했다. 바깥은 여전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모두가 좋아해 제주도에서 공수한 추자도 멜젓 소스를 불판 위에다 놓고 부글부글 끓여가며 고기를 구워 먹었다. 역시 ‘기간 한정, 지역 한정’은 포기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