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백배 즐기기

by 한낱


돌려 말하며 미화하지 말아야지. 이미 눈치챘겠지만 설거지를 싫어한다. 단언컨대 집안 살림 중에 제일 하기 싫은 일이다. 다른 집안 일은 끝이라도 있다. 오전에 청소기를 돌렸으면 청소는 끝이다. 세탁은 2~3일에 한 번이라는 루틴 이라도 있다. 건조대가 비길 기다려야 하니 어쩔 수 없는 공백이 생긴다. 그런데 이놈의 설거지는 하루 종일 끝이 없다. 매일매일 매 끼니마다 설거지거리가 쏟아진다. 한 끼 설거지만 걸러도 싱크대가 넘친다. 종갓집도 아니면서 밥도 매일 성실하게 해 먹지도 않으면서 그릇들은 왜 끊임없이 나오는지. 예전에는 게으름을 죄악시했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하기 싫은 일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들을 궁리해 내기 때문에 오히려 창의적이라고도 한다. 나는 창의적인 사람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어차피 피할 길은 없어 보이니 재미있게라도 할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었다. 아니, 들었다. 책 좀 읽었다 하는 이들은 언제나 이 책을 이야기했다. 물론 아주 옛날에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로는 본 적이 있다. 오래전이었기도 하고 참 재미를 느끼기에는 너무 어렸다. 나도 궁금해서 ‘그래, 내 눈으로 직접 읽어야지’하며 사 놓은 지 몇 년. 처음 책을 받아들고는 그 두께에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아침에 눈 떠 잠 깰 요량으로 늘 가던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슥슥 넘겨보다가 한 유명 출판사가 『오만과 편견』을 오디오북으로 출판했고, 그 기념으로 기간 한정 무료 듣기를 제공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오디오북? 예전에도 몇 번 싼 맛에 오디오북을 다운로드 받아 몇 권 들은 적이 있다. 들으면서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고 엄청 집중해서 듣지 않으며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 오디오북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던 나는 속는 셈 치고 접속했다. ‘뭐, 무료니까, 별로면 중단하고 책으로 읽으면 되니까’


웬걸! 너무 재미있었다. 설거지하면서 “어머머머! 이거 완전 막장 드라마야!”라는 말을 육성으로 뱉은 적도 있다. 성우들이 정말 실감 나게 책을 읽어주었다. 아니, 읽는다는 표현보다 연극을 오디오로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설거지할 때 무료함을 달래려고, 그냥 설거지만 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서 듣기 시작했는데 끊을 수가 없었다. 그다음이 궁금해서 일부러 산책길에 나선 적도 있었다. 혼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니며 들었다.


남자 주인공인 다아시가 잘 수집된 서가를 물려주는 것은 가문의 훌륭한 유산이라는 말에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래, 왜 나는 늘 책을 줄여야 한다고만 생각했을까? 책을 귀한 유산으로 여겼던 그 시대가 멋지기도 했다. 요즘은 책이 너무 흔하니 오히려 공간 부족으로 책을 더 늘리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시대다. 다아시의 말에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모이면 모이는 대로 모으다가 그냥 중고 책방이나 하든지 말든지.


그렇게 설거지를 하며 일일 드라마를 보듯 오만과 편견을 읽었다. 아니, 들었다. 설거지가 끝나는 게 아쉬워서 이것저것 더 씻을 거리를 찾기도 했다. 이 경험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음 책으로 고른 것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오디오북에 푹 빠져 설거지를 했다.


나는 원래 시각형 인간이라 라디오는 거의 듣지 않고 컸다. 대신에 어릴 때부터 TV를 아주 좋아했다. 지금 아이들의 스마트폰 중독을 나무랄 자격이 없을 정도로 TV를 좋아했다. 엄마는 드라마로 논문 쓰는 일을 하면 박사를 할 거라고 했다. 그때 적극적으로 그 분야로 진로를 잡았어야 했다. 요즘은 시청 시간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드라마는 매력있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한때 우리집은 IPTV에 많은 돈을 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새는 푼돈들이 모이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지출로 이어졌다. 마침 대한민국은 넷플릭스의 열풍에 휩싸였다. 우리집도 빠질 수 없지. 모든 IPTV 방송국 월정액제를 끊고 넷플릭스로 갈아탔다. 이것의 좋은 점은 탭이나 핸드폰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설거지를 하며 못 봤던 드라마를 한 편 한 편 떼나가기 시작했다. 이쯤되면 설거지가 더 이상 귀찮고 힘들지 않게 됐다. 다만 내가 아주 잘 해서 자막을 보지 않고도 미드, 영드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드라마는 다른 일을 하면서 화면은 보지 않고 귀로만 들으면서도 내용 파악이 다 되어 극의 흐름에 무리가 없는데 외국 영화나 드라마는 자막을 봐야하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넷플릭스의 무궁무진한 프로그램들을 설거지하면서 활용하지 못해 아쉽다. 아, 진작에 영어 공부 좀 해 둘걸.


넷플릭스까지 보는 마당에 유튜브는 당연히 설거지할 때 즐겨 이용하고 있다. 첫 시작은 시사, 정치였다. 도대체 왜 그렇게 돌아가는지 답답한 마음에 찾아보기 시작했다. TK, PK 속에서 나고 자랐던 나는 모르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저 어른들 하는 말이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그러다 점점 이건 아니지 않나? 의심하고 찾아보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잘 알아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당하게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즐겨 보는 유튜브는 1시간이 훌쩍 넘는 영상들이라 설거지 끝날 때까지 다른 것을 검색하지 않고 하나로 끝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다 코로나19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하던 때 북튜브를 알게 됐고 또 한동안 북튜브를 찾아보며 설거지를 했다. 북튜브도 질릴 때쯤 되니 유튜브는 특유의 알고리즘으로 인해 나를 미지의 세계로 마구 끌어당겼다. 생각지도 못한 분야의 영상을 접하기도 했다. 이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다. 다만 설거지할 때만 보는 것으로 나만의 원칙을 세웠다. 그렇지 않으면 내 하루가 각종 영상에 점령당할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단순 노동하며 틀어놓기에 딱 좋은 것이 유튜브다. 그저 틀어놓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주의 깊게 들을 필요도 없고 컨텐츠 특성상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그저 노동요처럼 틀어놓고 내 할 일을 묵묵히 하면 된다. 이용은 하지만 휘둘리지는 않겠다는 나만의 원칙.


넷플릭스고 유튜브고 오디오북이고 다 소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설거지거리가 조금밖에 없어서 뭔가를 틀기 위해 찾는 시간이 더 아까울 때, 혹은 그냥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을 때, 반대로 고민이나 문제가 있어 해결책을 생각해 내야 할 때는 어떤 미디어 매체도 켜지 않는다. 설거지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쌓여 있을 때는 손도 대기 싫지만 한 번 손에 물을 묻히고 수세미에 세제를 퍼올리는 순간부터는 기계처럼 하게 된다. 무념무상의 경지에 빠져들게 될 때도 있다. 복잡한 세상 그저 아무 생각없이 손만 돌리는 거다. 거품 머금은 수세미로 그릇들을 닦고 물로 시원하게 씻어내는 과정. 점점 싱크볼은 비워져 가고 깨끗해진 그릇들이 쌓여가는 걸 볼 때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붓지만 묘한 쾌감도 느껴진다.


혼자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시간.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슬며시 꺼내 계속계속 곱씹어 생각해 본다. 이건 이렇게 됐는데 그 다음은 어떻게하지? 뭔가 방법이 없을까? 저렇게 하면 이게 문제가 되겠지? 계속 끊임없이 고민하고 궁리하다보면 만화에서 머리 위 전구가 번쩍 켜지는 것처럼 아이디어가 ‘팟!’ 떠오를 때가 있다. 정말 전구에 불이 켜지듯이. 그럼 손에 묻은 거품을 씻어내고 재빨리 메모를 해 둔다. 그렇게 영감처럼 온 아이디어는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그렇게 해결해 낸 문제나 풀어낸 글쓰기의 실마리들이 꽤 된다. 심지어 이 글도 그렇다.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내가 싫어하는 설거지를 이렇게 재미있어 할 때가 있네?’ 싶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은 이제 너무 고리타분하다. 요즘은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라고까지 말한다. 나는 어느 쪽을 택했나. 피할 수 없으니 즐길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있어? 싶을 정도로 싫어하니까 이것저것 시도하게 되는 거다. 싫어하면 피해야 하나? 아니면 재미있게 할 방법들을 찾기 위해 고민해야 하나. 요즘 싫어지는 일들이 있다. 설거지에서 힌트를 얻었다. 싫은 일을 꼭 해야 한다면 더 들이밀고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구나. 오늘도 설거지를 하면서 머릿속은 폭풍이 일어나길 기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