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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낱 Apr 06. 2021

쎄씨보다 쿠켄

1부 그릇-그며들다(그릇에 스며들다)

  

 옛날 옛날 먼 옛날, 내가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넘어갈 즈음, 쎄씨(Ceci)라는 패션 잡지가 있었다. 우먼센스, 여성동아 같은 여자 어른들이 보던 잡지만 있던 시절, 10대, 20대를 겨냥한 패션 잡지가 론칭했다. 당시에는 ‘논노’나 ‘앙앙’이라는 여학생 타깃의 일본 패션 잡지가 유행하고 있었다. 아직 일본 서적이나 노래, 영화 등이 공식적으로 유통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논노나 앙앙을 보기 위해서는 일본 서적 전문 서점에 책값에다 배송비와 수수료 등까지 더한 돈을 지불하고 구매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우리나라에도 일본의 ‘논노’ 같은 잡지가 생겼으니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서점에서 손쉽게 사 볼 수 있는 패션 잡지가 나왔다는 말은 여학생들을 위한 새로운 문화와 패션 시장이 크게 출렁거렸다는 말이었다.      

 

 어쨌거나 쎄씨를 보지 않는 여학생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최신 유행 아이템이나 스트리트 패션 사진과 인터뷰가 실리며 각광을 받았다. 심지어 실제로 내 친구 커플이 잡지에 실린 적도 있다. 그 당시 쎄시의 인기몰이에 힘입어 10~20대를 겨냥한 여러 패션 잡지들이 등장했다. 잡지를 사면 주는 사은품들 또한 거창했다. 백화점 1층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 해외 브랜드 화장품 샘플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호기심에 여러 잡지를 사기도 했다. 그 당시의 나는 고급스러운 향기와 화려한 조명으로 반짝이던 백화점 1층에 들어서면 늘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학생 신분으로 그 비싼 화장품들을 매장에서 살 수는 없었지만, 어른 잡지에서만 보던 화장품에 대한 호기심과 적당한 허영심을 채워주기도 했다. 게다가 매달 친구들과 서로 다른 잡지를 사서 돌려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런데 나는 조금 특이한 부류였다. 패션과 뷰티를 다룬 잡지보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한 것으로 기억하는 요리 잡지 ‘쿠켄’을 더 좋아했다. 당시 쿠켄은 본격 요리, 푸드스타일링을 다룬 유일한 잡지였다. 일반 여성 잡지에서 구색 맞추기 식으로 몇 페이지만 할애해서 실은 조잡한 음식 사진과 레시피가 있었다면 쿠켄은 한 권이 통째로 제대로 된 레시피며 푸드 스타일링 화보였다. 그야말로 화보였다! 비싼 수입 브랜드의 옷이나 가방이 아닌, 한 접시의 음식을 잡지가 펼쳐진 두 쪽에 걸쳐 패션 화보처럼 편집한 스타일리시한 잡지였다. 푸드 스타일링의 세계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때, 각 분야의 푸드 스타일링 전문가들이 총출동해 작업한 화려한 음식 사진과 그릇, 스타일링에 혼이 쏙 빠졌다. 처음으로 정기구독까지 해가며 보던 잡지였다. 아마 그때부터였지 싶다. 나의 그릇 사랑은.     

 

 무궁무진한 그릇의 세계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 요리 잡지를 보며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나도 만들어 봐야지’가 아니라 ‘저 예쁜 그릇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는 걸까?’라는 생각으로 탐독했다. 패션 화보 못지않은 고퀄리티의 음식 사진 옆에 깨알같이 적어 놓은 그릇 정보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그릇 브랜드에 대한 정보들을 익혀나갔다. 쿠켄은 그야말로 음식이 주인공이고 그릇이 주인공이었다. 또래들이 패션 잡지를 보며 자신을 스타일링하는 연습을 할 때 나는 당장은 사지도 못하고 써먹지도 못할 식기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저 음식 사진을 멋지게 담은 화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했다. 적어도 나에게 그것들은 감히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은품이 탐 나서, 심심해서 한 권씩 사 봤던 패션 잡지들은 미련 없이 다 버려도 정기구독으로 모아둔 쿠켄은 버리지 않았다. 시간 날 때마다 들춰보며 나만의 소확행 시간들을 보내곤 했다. 디지털 미디어 사회로 진화하면서 점점 잡지들은 인터넷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마니아들을 위한 쿠켄 같은 잡지는 더 빨리 실물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 아쉬울 뿐이다.     

 

 나는 그렇게 그릇의 세계에 스며들었다. 그릇과 커트러리, 신기하고 새로운 조리도구들. 가치관이 형성되는 20대 초반에 그릇의 매력에 빠져서일까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릇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리에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보통 요리를 좋아하면 그릇을 좋아하게 된다던가 그릇을 좋아하다 보면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마련일 텐데 그저 우직하게 그릇만이 좋다. 알 수 없는 나의 내면세계란. 아무튼, 그릇이 좋고 예쁜 커트러리가 좋고 특이한 조리도구가 좋다. 그런 것들이 보이면 쓰지 않더라도 부지런히 모아둔다. 아무래도 나는 다람쥐띠인 것이 틀림없다. 미니멀리스트는 진작에 포기했다.     

 

 경제활동을 하는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는 나도 내가 갖고 싶은 그릇들을 하나씩 사 모을 수 있게 되긴 했다. 내가 그릇을 사든 옷을 사든 신발을 사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시기가 오기는 했다. 아이를 키우며 사귄 맘 친구들은 제각각의 취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쇼핑을 가면 중점적으로 구경하는 매장이 달랐다. 누구는 이불 매장(그녀는 내 그릇 사랑만큼이나 이불을 사랑했다), 누구는 식품. 나에게는 언제나 그릇 매장이 제일 우선이고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던 곳이었다. 그릇을 파다 보면(덕후 용어-애정을 쏟고 파헤치다 보면) 내가 살 수 있는 그릇보다 손에 닿지 않는 그릇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럽의 마이센, 헤랜드, 로열 코펜하겐, 리처드 지노리, 베르나르도 등 내게는 너무 먼 당신들이었다. 국내 백화점에는 들어오지 않은 식기 브랜드들이 외국 백화점에는 생활 도자기처럼 매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며 부러워하며 감탄한 적도 많았다. 그것들을 갖지 못해 우울해하기 하기보다는 멋진 스타일링 화보를 보거나 백화점 매장에서 직접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렇게 패션, 뷰티 잡지보다 요리 잡지를  좋아하던 아가씨는 시간이 흘러 여전히 옷이나 화장품보다는 그릇에 욕심 많은 아줌마가 되어있다. 그것도 그냥 비어 있는 그릇을 좋아하는 아줌마로. 지금도 백화점 1층보다는 8층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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