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내게 절실한 것을 찾다

2019년 가을, 사춘기 입문 딸과 갱년기 입문 엄마의 싱가포르 여행

by 한낱


올해 봄, 여행에 관한 산문집 하나가 화제였다. 바로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은 곧 여행이고 모든 여행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인기 있었던지 작은 서점 버전이나 바캉스 버전으로 책 커버를 바꿔 출간하기도 했다. 정작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내 여행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일주일 전 딸과 함께 싱가포르로 여행을 떠났다. 사춘기 입문기인 열세 살 딸과 딸의 절친, 그리고 그녀의 엄마. 이렇게 넷이서 호기롭게 떠났다. 이 여행을 떠나기 위해 나는 여름방학도 없이 일을 했고 정신없이 내게 닥친 일들을 해치워야 했다.

패키지보다 훨씬 비쌌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항공권도 숙박도 따로 끊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자유로운 여행. 그만큼 많은 준비가 필요하고 신경을 써야 했다. 아이들이 그동안 배운 영어를 써 보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떠났다. 지방이라 뜬 눈으로 새벽 리무진 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공항에 도착해 모든 수속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다짐했다. 좋은 여행이 됐으면 좋겠다고.

한창 틴트에 꽂혀있는 딸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친구를 꼬드겨 샤넬 틴트를 산다고 돌아다녔다. 나도 못 발라 본 샤넬 틴트. 그래, 뭐든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좋은 것을 알아야 좋고 나쁨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하니 내버려 둔다. 실컷 해 봐야 미련이 없는 딸임을 알기에.





“헉! 여기가 정말 싱가포르 맞아?”
“그러게~ 너무 무서워~”

공항에서 숙소로 찾아간 때는 일요일 늦은 오후였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외국인 노동자들인 듯 보이는 남자들이 떼를 지어 길바닥에 앉아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있었다. 싱가포르는 무단횡단도 안 하고 쓰레기도 버리면 안 되는 나라. 법을 엄격하게 지키고 무척 깨끗한 나라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홍콩에서는 필리핀 헬퍼들이 주말에 주인 가족을 위해 집을 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들이 육교와 건물 사이의 통로를 점령하고 앉아 밥을 먹고 수다 떨고 있어도 무섭지 않았다. 이미 들은 이야기도 있고 여자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이번은 달랐다. 하지만 아이들 앞에서 무서운 내색을 하지 못했다. 괜한 공포감을 주기 싫었고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에 대한 편견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주말을 보내는 그들만의 방식인 것 같았다. 그다음 날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했다. 세상 다양함을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왔으니 이 또한 즐겨야지.

싱가포르에서 곳곳의 관광 스폿을 찾아다니고 이런저런 음식들을 맛보며 즐겼다. 아이들은 아이유가 찍었다는 인생 샷도 따라 찍어 봤다. 비록 그 사진을 찍기 위해 엄마들은 무릎을 꿇었지만.





“엄마, Sorry~가 아니고 I’m so sorry~라고 엄청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해야지~”

딸아이가 내 화를 돋운다. 마트에서 물건들 주워 담고 있는데 딸이 가지고 있던 음료수를 내게 넘기고 화장실 간다며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안 그래도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쇼핑하다가 음료수를 쏟고 말았다. 바닥에 흐른 음료수는 휴지를 가져와 깨끗이 닦았지만 바구니에 흘린 것은 미처 닦지 못했다. 계산대에서 인도인 점원이 나에게 짜증을 낸다. 바구니에 흘린 음료수 때문이었다. 물론 내 잘못도 있지만 그 자리에서 내편을 들지 않는 딸이 인도인 점원보다 더 미웠다. 집에 가는 길에 얼마나 아이에게 화를 냈던지. ‘누구 덕분에 영어를 할 수 있게 됐는지, 고마워하지도 않고 나를 무시하다니.’ 자존심 상한 나는 필요 이상으로 아이에게 화를 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화 낼 필요는 없었는데. 여행지에서 예민했었나 보다.

패키지여행에서는 가질 수 없는 자유시간도 마음껏 가졌다. 돌아다니다 지치면 호텔로 돌아와 수영하며 휴식을 취하고 저녁에 다시 나가기도 했다. 아름다운 야경에 할 말을 잊기도 하고 잘 정돈된 콜로니얼 양식의 건물들을 보며 감탄했다. 래플스 호텔의 ‘롱바’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싱가폴 슬링’도 직접 맛을 보기도 했다. 래플스시티몰의 푸드코트에서 처음 보는 주문 시스템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어떨 때는 생각보다 불친절한 점원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즐겁고 행복한 기분과 지치고 피곤함은 동시에 왔다.

이번 여행에서 깨달음은 세 가지이다. 첫째, 노노 재팬 운동인 지금, 일본 여행의 대항마는 싱가포르가 아닐까.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깨끗함, 발전된 산업, 아기자기한 관광지, 맛있는 먹거리 등. 비행시간이 조금 더 길고 항공권이 조금 더 비싸긴 하지만 충분히 일본을 대신할만했다.

둘째, 체력. 여행은 곧 체력이다. 운동을 쉰 지 2년이 넘어간다. 운동이 너무 싫다.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 하지만 힘든 게 싫다고 미뤄왔다. 게다가 한 발자국도 걷지 않고 차를 타고 다니려고 했다. 그러니 하루에 이만 보 이상 걸어 다녔던 여행에서 다리며 허리가 안 아플 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다시 운동 시작해야지’ 백 번도 더 생각했다.


셋째, 영어 공부의 필요성. 현지의 영어는 동남아 특유의 억양과 발음에 중국어 영향까지 받아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다. 어찌어찌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충분히 전달하지 못할 때 무능함을 느꼈다. 아이들에게 경비를 주고 알아서 식사를 주문하고 계산하고 물건도 사게 했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척척 잘해 냈다. 평균 수명 백 세라고 하는 데 ‘아. 나중에는 아이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아이들에게 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당장 영어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여행을 하는 갖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냥 쉬러 가는 것 자체도 이유일 수 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여러 가지를 얻었다. 휴식도 되고 새로운 문화를 접해서 신기하기도 했지만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설계하고 보내야 할지도 생각하게 된 귀한 계기가 됐다.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브라보! 내 인생”을 위해.


뒷이야기.
모두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아직도 운동은 시작하지 않고 있고, 영어 공부를 위한 세팅은 하지 않았다. 내 다짐과 의욕이 사라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다.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