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오징어 게임을 시작하지
나는 갑이다. 계속해서 말하지만 '진짜' 갑은 아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나를 갑으로 여기고 회사도 갑이고 갑이라고 여겨지는 시선에서 이 글을 써보려고 하니 갑이라고 해야겠다.
카톡이 울린다.
미리보기에서 뜨는 것으로 무슨 내용인지를 대충 캐치한다. '아 그렇지. 자료 드려야지' '아 그렇지. 회신드려야지' '아 그렇지. 전화드려야지' 하지만 카톡의 '읽음' 표시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카톡을 '읽음' 표시로 만든다는 것은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읽고 만 상태로 그냥 둔다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나고 그가 원하는 상황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내가 그걸 읽는다고 해서 사실 달라질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간혹 그 '읽음'표시를 만들지 않으려 한다.
그 역시 예의가 없음을 안다.
나는 핸드폰에서 앱 옆에 숫자가 떠 있는 걸 못 참는 사람이다. 메일도 그렇다. 안 읽은 메일이 있다면 그건 내게 스트레스를 준다. 바로 읽고 바로 생각해서 회신을 주는 일이 좋다. 하지만 매사가 그렇진 않다. 판단을 늦게 해야 한다거나 아예 판단이 불가한 경우도 있다. 그럴 때에는 내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앱 옆에 붙은 숫자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 숫자는 내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다. 제때 일을 못한 벌이다. 조금만 더 빨리 보고하고 좀 더 확실한 의사결정력을 가졌더라면 나는 저 숫자를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숫자가 2, 3을 넘어서 늘어날 때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이 그만큼 쌓인다는 것을 안다. 정확히는 하지 않은 일이 그만큼 쌓여있는 것을 안다.
대행사 출신이다 보니 대행사에서 일을 하는 친구들이 제법 있다. 도대체 자기 광고주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다면서 하소연을 할 때면, 나와 함께 일하는 대행사의 담당자가 어딘가에서 친구에게 '도대체 그 사람은 뭐가 그렇게 바쁘거니? 회신을 안 해. 답을 줘야 할 거야 아니야' 라며 푸념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뜨끔한다. 그렇지만 답을 안 읽는 건 주로 답을 읽었지만 회신을 못주는 상황을 공유하는 게 싫은 거라고, 전에도 줬던 그 답변을 이번에도 똑같이 줘야 하는 게 민망해서라고는 말을 못 했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정말 일부. 오히려 일이 많은 경우가 대다수다. 대행사에서 주는 아이디어와 내용들을 검토하고 공유하고 결정하는 게 주요 업무다. 그렇다고 그 업무만이 전부는 아니다. 때론 주요 업무가 가장 작은 부피로 존재하곤 한다. 실제로는 팀 내 이슈나 매일 해야 하는 업무들이 주를 이룬다. 예를 들면 이렇다.
아침에 와서 전날 쌓인 메일을 본다.
컨펌을 해줄 수 있는 것들은 바로바로 회신을 준다.
때로는 저장을 꼭 해놔야 하는 자료들이 있다. 언제고 누군가 찾을 수 있는 자료들. 그런 것들은 또 까먹지 않게 저장을 한다. 메일 상태로 저장해둘 수도 있지만 하는 일이 콘텐츠 관련 일이다 보니 주로 용량이 꽤 큰 것들이 많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어제도 봤던 매체지만 오늘도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을 한다.
이제 아침 루틴은 끝났고 대행사에서 준 안을 보려는 하필 그 타이밍에 (정말이지 하필 그 타이밍에)
어제 미뤄졌던 보고를 해야 하는 이슈가 나타났다. 보고는 나도 하지만 팀장을 비롯해 나보다 높은 직급의 사람들이 챙기는 일이다. 그러면 내가 하려는 일은 밀린다. 텍스트 한 번 수정, 장표 한 번 출력, 그런 것들을 반복해서 하다가 결국 오전이 날아간다. 보고는 타이밍을 놓쳐 오후로 미뤄진다. 아까 그 버전이 좋다면서 마지막 버전 뒤에 붙이자고 한다. 그리고 준비한 장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표 한 장만 쉽게 만들어서 준비해 가자고 한다. 한 장에 만들어오라는 지시가 있었으니 그것도 지키고 싶은 거다.
점심을 먹고 와서 보고 장표를 준비하고 무한 대기를 탄다. 이 시간에 제안 준걸 봐야지. 파일을 열어서 보고 있노라면 메신저가 울린다. 여러 개가 울린다. 친한 동료들이 주는 이슈는 재미있는 경우도 많지만 '알려주는' 이슈들도 많다. 이거 알아? 이거 들어봤어? 이런 이슈는 너네는 없어? 그런 건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친한 동료들이 챙겨주는 이슈기 때문에 나에게 도움이 될 확률이 높다. 모르는 이름의 메신저가 온다. 무언가 요청은 하시는데, 이 업무가 내 업무는 아닌 것 같고 애매하다. 수소문을 해서 대행사를 연결해야 할지, 처리해야 할지, 여기서 끊어야 할지 고민한다.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3개 이상의 부서의 담당자를 수소문한다.
아직 답변을 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받은 제안서를 검토를 다 하지 못한 걸 어떻게 알고, 이 제안서를 챙기라는 지시를 듣는다. 커피가 필요하다. 세 잔은 아닌가?... 그냥 물을 마신다.
팀원을 챙겨야 하는 이슈가 생길 수도 있다. 팀 내 업무를 서포트해야 한다거나 하다 못해 뭔가 물건을 받아와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일에 흐름이 내 맘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대행사에서는 제안에 대해서 언제 회신을 줄 수 있는지 묻는다. 눈을 감고 싶지만 핸드폰 화면을 끄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것만 하고 바로 답 드릴게요. 혼자 되뇐다. 연락을 준 담당자에게 직접 말씀드리지 못해 오늘도 죄송합니다. 빨리 볼게요.
자의로 바쁜 것은 아닌데 바쁘다. 내가 죄송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죄송하다. 챙겨야 할 것이 한가득이면서 당신의 것도 챙겨야 하는 걸 알고 있어서 더 죄송한 것 같다. 그렇지만 고의는 아니었어요. 바쁘다는 건 핑계고 열정은 마음에서 지피는 것이며 업무량은 언제나 무언가를 더 할 만큼 조정할 수 있어 보이지만, 현실은 내일은 꼭 회신을 바로 해야지 라고 다짐하면서 '자의로'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시는 정도의 권한이 있을 뿐이다. 다른 대행사와 갑이라고 해서 내 일에서 갑은 아닌 건데, 그걸 깨달으면서 일하지 못했다. 수많은 죄송함 끝에야 그걸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아 또 한 번 죄송하다.
#직장인의 경험을 동반한 상상의 글입니다.
#갑은 광고주, 을은 대행사로 한정 지어 말한 것이니 확대해서 생각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