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오징어 게임을 시작하지
"안녕하세요. 혹시 저희가 보낸 제안 결과 나왔을까 해서요"
"아 네. 아직 보고 전이라서요. 저희도 지금 보고 타이밍을 보고 있어요. 보고 드리고 말씀드릴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엇이 감사할까. 그냥 하시는 말이겠지. 사실 이 전화를 건 사람도 그 위에 사람이 '제안 어떻게 됐나 확인해봐.'라고 물어본 건 아닐까? 이런 통화를 하고 끊으면 '아휴 그 회사는 늘 답을 늦게 주더라. 알겠어. 계속 체크해봐.'라고 담당자가 한소리 듣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미안한 일이다.
나는 [보고]라는 말을 심지어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하면서 네 번이나 사용하면서 대행사에 상황을 전달할 수 있었다. [보고] 누군가는 회사 생활의 꽃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회사 생활에서 가장 간소화시켜야 할 거라고 하기도 한다. [보고] 장표는 한 장으로 줄이라고 하지만, 그 한 장을 만들기 위해 수십 가지 버전을 만들어야 하는 건 논외다. 어쨌든 그 보고를 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그 제안의 성사 여부를 말해드릴 수가 없어서 또 죄송합니다.
나는 대기업에 다닌다. 막상 다니는 입장에서 대기업인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주변에서 대기업이라고 하니 대기업이다. 월급도 적은 것 같지만 그런 소리하면 이상한 듯 쳐다본다. 그렇지만 적다. 여하튼 그 안에서도 대행사들과 많이 일을 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제작사, 매체사, 디지털, 홍보, 광고 등등.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고 싶었고 그쪽으로 레퍼런스를 만든다고 생각하면서 벌써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 사회생활은 대행사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갑과 을. 정확히는 을의 입장에서 조금 더 생각을 한다고 여겼다. 물론 이게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는 일하면서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갑이라는 곳에서 일을 한다.
그렇지만 막상 일을 해보니 회사가 갑인 것이지 직원이 갑은 아니었다. 임원들도 마찬가지고 CEO도 마찬가지다. 현장에서의 갑과 을. 갑질과 을질에 대한 얘기가 돈 다지만 회사에서의 갑과 을은 생태계가 늘 번복된다. 그리고 막상 회사 생활에서 알게 된 사실은 갑회사에서 다니지만 나는 늘 죄송하다고 말을 많이 하는 을이었다는 것이다.
요청하시는 수많은 자료들과 권한들을 가지지 못해 죄송합니다. 떵떵거려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가지지 못한 채로 그런 척해야 했던 것도 죄송하고요. 그리고 그걸 항상 이해한다고 진심으로 말씀해주시는 담당자분들께도 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직장인의 경험을 동반한 상상의 글입니다.
#갑은 광고주, 을은 대행사로 한정 지어 말한 것이니 확대해서 생각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