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이라는 게 명확해지는 순간들

○△□ 갑오징어 게임을 시작하지

by 나도모

밑장 빼기도 아니고, 언제는 갑이 아니라며.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회사에서 갑의 위치에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당연코 첫 번째는 계약서를 작성할 때다. 갑을 이슈가 핫해지면서 갑과 을이 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말라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조치가 있긴 했지만, 단순히 돈을 지급하는 쪽이 갑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계약서를 작성하기까지 비딩이라거나 업체 탐방, 업체에 관한 수소문과 레퍼런스 체크들을 해나가는 과정을 하는 이유는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야 할 때이다. 물론 말로 하니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냥 상식선이랄까. 근데 상식이 또 기준이 다르다. 그래 정확히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거나 손바닥을 뒤집는 일을 벌일 때이다. 그럴 때가 많냐고? 5분 전에 '확인했어요 진행해주세요'라고 보낸 메일에 다시금 전달로 '하나만 더 수정해주세요' '팀장님이 마음에 안 드신다네요' '브랜드 전체 방향이 바뀌었네요' 등의 메일을 쓰는 일이 허다하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후배가 도대체 왜 이런 메일을 써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없는 건 못한다고 하시겠지. 우리는 일단 요청은 해봐야지. 우리가 무슨 힘이 있겠어.'라고 힘 있는 메일을 쓴다.


세 번째는 주체적으로 일하라는 얘기를 들을 때 = 전문성이 없다고 느껴지는 때이다. 대행사와 함께 일하는 이유 or 협력사와 함께 일하는 이유를 내 나름대로는 그들이 '전문가'이기 때문이라고 답을 내려놨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그들만큼의 전문성과 실행력이 내게 없어서다. 회사는 가끔 내게 아이디어를 요구하거나 실행을 직접 하길 요구한다. 단일 브랜드를 관리하는 회사도 아니고 해당 고민을 전문으로 해야 하는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이유와 '크리에이티브'를 요하는 직군에 있다는 이유로 제품에 쓰이는 문구 하나, 제품명 하나까지도 착즙 같은 제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겠는가. 글자 몇 자 쓰는 일이 어렵다고. 하면서 그걸 한다.


그렇지만 그건 잘못된 경우다. 그걸 하면서 같은 주제로 제안을 하는 대행사들에게 미안하다. 그들의 고민은 나의 이런 찰나의 고민과는 달랐을 것이다. 여럿이 머리를 맞댔을 것이고 경우의 수를 따졌을 것이다. 그렇게 나온 아이디어와 책상에서 끄적인 나의 아이디어가 같은 수준에서 검토된다는 건 참 미안한 일이다. 이런 경우 조직은(혹은 조직의 리더는) 그 일을 하는 대행사의 전문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깨닫는 순간이면 갑이라는 걸 느낀다. 을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을에게 한없이 기대거나, 을과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을 들을 때. 을이 내미는 전문성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직원으로서의 나를 발견할 때 그놈의 갑이라는 걸 깨닫는다.


모든 아이디어가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아이디어를 내오지 못한다고 함부로 그 아이디어의 과정을 밟는 순간 그건 정말 갑(질)이 되는 순간이다. 대신 생각해주고 전문적으로 기획해준 과정들만 잘 얻어가도 이미 시간을 사서 축적시킬 수 있는 좋은 자산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갑을 관계로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무시한다면, 그래서 그들의 전문성을 무시한다면, 대놓고 무시하지 않더라도 자기 회사 내에서도 충분히 짜는 아이디어 아니냐는 식으로 바라보면다면 그것이야 말로 갑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직장인의 경험을 동반한 상상의 글입니다.

#갑은 광고주, 을은 대행사로 한정 지어 말한 것이니 확대해서 생각은 말아주세요.

이전 04화갑의 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