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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동나동 Nov 11. 2019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분노는 온당한가?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소설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때문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게 아니다. 소설은 차라리 르포에 가깝다. 작가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애초에 현실 속 여성의 삶이 어떤지를 보여줄 목적으로 쓴 소설이어서 통계자료가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태어나고 자라고, 학교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갔다 결혼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게 되기까지 매 단계마다 수많은 김지영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고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여러 통계자료를 인용한다. 


영화는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이, 특히 많은 남성이 거부감 없이 보게 만들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현재 시점, 즉 출산 이후 육아에 전념하는 김지영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여성이 성장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차별에 대해서는 그다지 부각시키지 않았다. 또 남편 대현(공유) 역시 소설보다 영화에서 훨씬 비중이 큰 데다 소설 속 특징 없는 캐릭터와 달리 영화는 여러 모로 좋은(혹은 이 정도면 훌륭한) 남편으로 묘사한다.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남성의 노력과 무관하게 여성이 겪는 구조적 고통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성별 대립구도를 넘어 여성의 고통에 공감하게 만들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게 만들기 위해서 소설보다 한층 톤 다운된 영화를 만든 것이다. 영화관에서는 훌쩍이는 여성들이 엄청 많았고, 사이사이 함께 공감하며 영화를 보는 남성들도 눈에 띄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 별점. 극과 극으로 나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별점. 역시 극과 극으로 나뉜다. 


그런데도 논란은 계속된다. 언론이 부추기는 면도 있다. 언론은 자극적인 대립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소설이나 영화 별점만 봐도 대립구도는 분명해 보인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91026/98070649/2 

https://news.v.daum.net/v/20191104100336933


여기서 주목할 점은 언론들, 특히 보수 언론들이 2030 세대 남성들의 불만에 초점을 맞춰 영화평을 기사화한다는 점이다. 이는 현 정부에 대한 20대 남성 지지율이 매우 낮은 점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에서는 연령과 지역이 항상 지지율 분석의 주요 틀이었는데 처음으로 성별이 주요 분석틀로 등장했다. 성별 지지율 격차는 유난히 20대에서 많이 벌어진다. 이는 세대론과 결합되어 20대 남성의 불만과 고통을 드러내기 좋은 조건을 형성하고, 젊은 세대에게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었던 보수 정당과 보수 언론은 이 점을 집중 공략해서 분노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기 바쁘다. 여기에는 경제적 요인 외에도 군대와 같은 문제 또한 뇌관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미투 운동을 비롯해 최근 불붙은 페미니즘 열풍과 반페미니즘 현상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http://www.segye.com/newsView/20190807510703?OutUrl=daum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대립구도는 어느 정도 숫자로도 확인이 된다. 반페미니즘을 표방하는 2030 남성층이 존재하는 것도 확인된다. (시사IN 제604호 -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 중요한 것은 현실로 존재하는 갈등을 현상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점검하고 대안을 찾는 일이다. 그런데 언론과 정치는 이 대립구도를 계속 키우기만 한다. 마땅히 해법을 제시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자신들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함이다. 


데이터는 단지 현상만을 말해줄 뿐, 해석에는 관점이 따른다. 20대 남성이 갖는 불만은 한마디로 "이전보다 훨씬 먹고 살기 힘들어졌고 삶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데 의무는 여전하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2030 남성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 2030 여성들 때문인가? 오히려 기성세대로서 경제발전의 성과를 독점하고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시대에도 온갖 기득권을 놓지 않고 있는 5060 남성들 때문은 아닌가? 그런데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동세대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더 불행한 위치에 있다고 느끼고 종종 그 불만은 동세대 여성들을 향한다. 2030 남성이 동세대 여성에게 피해의식을 투사하는 일은 왜 부당한가? 예를 들어보자. 


최근 연구조사에 따르면,

20대 여성은 남성과 학교와 학과, 학점 등 ‘스펙’이 모두 같아도 남성의 82.6%밖에 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84330.html


성별 임금격차에 대한 내용은 최근 출간한 저서 <수학의 눈으로 보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중 <82년생 김지영> 편을 참고


얼마 전, [수학과 페미니즘]이란 주제로 북콘서트를 했다. 패널로 참여했던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은 "여전히 존재하는 사실 자체의 진위 여부를 가지고 싸워야 한다는 게 답답하다."라고 했다. 성별 임금격차가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조차도 논쟁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 대한 피곤함을 표현한 것이다. 


여성은 일상에서 다양한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고 있으며 노동시장에 있어서도 차별을 받고 있다.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OECD 국가 중 압도적 1등으로 사회문제로 대두된지도 제법 되었다. 그런데 그동안은 성별 임금격차를 이야기할 때 경력단절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차별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이 연구 결과 새롭게 드러난 샘이다. 결국 2030 남성의 대립항은 2030 여성이 아니라는 의미다. 


상대적 박탈감의 원인을 2030 여성들에게 돌리는 것은 결국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행위다. 이 대립구도를 부채질하는 언론과 정치는 결국 그동안 여성들이 힘겹게 감내해 온 고통을 그냥 유지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샘이고, 이를 위해 2030 남성들의 불만을 부당하게 동원하는 것이다. 이 대립구도가 고착화되면 사회는 해법을 찾지 못하고 출구가 꽉 막혀 버린다. 서로 불행 배틀을 하며 고통의 원인을 전가하며 서로를 혐오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는 부드러운 화법으로 말을 건네는 것이다. 대현이 그렇게 착하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뭐가 불만이냐고 따져 묻지 말자. 대현이 그렇게 착하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바뀌지 않는 현실이란 게 있다는 게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이니까. 결국 같이 바꾸지 않으면 다 같이 불행하다. 불행을 더 큰 불행으로 덮을 게 아니라, 고통이 더 큰 고통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결국 정치가 문제다. 정치가 해결을 못하면 우리들이 나서서 바꿔야 한다. 함께 행복해지는 길이 뭘까 생각해보면 거기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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