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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동나동 Dec 07. 2019

양준일, 그리고 서칭 포 슈가맨


음악으로 보는 90년대 초반


보통은 스무 살 전후, 누구나 자신이 가장 많이 듣던 그때 음악을 최고로 여기곤 한다. 

유튜브에서 이전 음악들을 검색해보면 그때 음악이 최고였다는 댓글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춤도 그때가 최고고 가창력도 그때가 최고고 무대매너도 그때가 최고다.라고 각자 자기 시대 음악을 칭찬한다. 마치 자신의 리즈 시절이었던 것 마냥 젊음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심리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자기 시대 음악이 최고였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보상심리를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90년대 초반은 한국에 아이돌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 가수들이 스스로 시스템을 주도했던, 그야말로 잠시 꽃 피웠던 싱어송라이터들의 전성기였다. 87년 민주화 이후 터져 나오기 시작한 온갖 장르의 범람을, 기획사 시스템이 채 갖춰지기 전에 다양하게 트렌드를 앞서갔던 개인들이 흡수해 소화하던 시대였다. 유튜브도 없었다. 외국에 어떤 노래들이 유행하는지, 세계적인 추세가 어떤지 알 길도 없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공테잎에 노래를 녹음해 선물하고, 야자 시간마다 제도 샤프로 테이프를 돌려가며 미니카세트로 음악을 듣던 그 시대. 곧 다가올 음반시장의 최전성기와 아이돌 시스템의 도입을 예비하고 있던 그 시대. 


김현철, 윤상, 신해철(넥스트), 이승환, 서태지, 이상은, 강수지 등등. 자기 스타일이 확고하면서 스스로 노래도 만들 줄 알고, 경우에 따라 프로듀싱까지 모든 게 DIY로 가능했던 능력 있는 개인들의 출현. 90년대 초반은 그런 시대였다. 흔히 원조 아이돌이라고 말하는 H.O.T와 젝스키스로 상징되는 기획사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갑자기 열려 버린 차원문을 통해 미지의 음악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던 그때. 


양준일, 리베카


<슈가맨 3>에 출연한 양준일이 화제다. 1991년 '리베카'란 곡 몇 번 부르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가수인데 <온라인 탑골공원>이란 스트리밍 서비스에 소개되며 화제에 오르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 낸 양준일은 유튜브에서 시대를 앞서간 스타일리스트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90년대 GD(지드래곤)이었다, 앞서간 천재였다는 등의 입소문에 힘입어 TV에 다시 출연한 양준일은 확연히 늙어 있었다. 얼굴에 많은 사연이 감춰져 있으리라 미뤄 짐작 가능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QNlbD8B49Q

양준일 부른 '리베카' (1991년)


양준일, 리베카, 슈가맨 3 등이 실검에 오르내리며 양준일의 지난 과거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다. 방송 몇 번 출연하고 사라진 사정은 황당했다. 


"당시 한국에 입국할 때 미국인으로서 10년짜리 비자를 가지고 들어왔었는데 6개월마다 확인 도장이 필요했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에게 '너 같은 사람이 한국에 있다는 게 싫다'는 말을 들었다. 도장을 안 찍어줬다"

또 그는 자기의 곡 '리베카'나 '가나다라마바사'를 직접 작사해야 했던 이유에 대해선 "유명한 사람에게 곡을 받고 싶었는데 아무도 절 위해서 작사를 안 해줬다"라고 말했다. 



그 뒤로 양준일은 다시 음악을 시도했지만 회사와 계약 문제로 생활고를 겪었고, 지금은 미국으로 돌아가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고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  


다시 돌아오는 질문. 90년대 초반은 어떤 시대였는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어떤 뮤지션을 통해 엿보는 한 시대, 그 시대 음악에 대한 편린들. 갑자기 TV프로 <슈가맨>이 제목을 따 온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이 떠올랐다. 양준일로 시작된 추억 더듬기는 지난 영화에 대한 소환으로 이어졌다. 


영화 <서칭 포 슈가맨>



자동차 공업 도시 디트로이트.

로드리게즈는 집수선공이면서 뮤지션이었다. 그의 앨범은 미국에서 단 6장만 팔렸다. 그 앨범이 산 넘고 물 건너 남아공으로 건너갔다. 인종차별과 독재에 고통받던 사람들은 그 앨범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해적판 앨범은 100만 장도 넘게 팔렸고 실체를 모르는 가수에 대해서 소문이 분분했다. 남아공에서 로드리게즈는 비틀스, 사이먼&가펑클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드리게즈를 찾았고 결국 2만 명을 꽉 채운 기적 같은 공연이 성사되었다.


"많은 관중들이 있었지만 다시 돌아와서 잔디를 깎고 청소를 하고 육체노동을 했어요. 여기 남은 거죠. 삶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요. 그의 삶에서 화려함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많은 면에서 아버지는 부유하시지만, 물질적인 면에서는 아닐 거예요. 그가 전에 살던 삶은, 아직도 그가 살고 있는 삶이에요."


"할아버지가 멕시코 분이세요. 멕시코 사람들은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디트로이트로 왔어요. 그래서 우린 노동자 계급이고, 블루칼라이고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죠. 우린 25번이나 이사를 했고 어떤 집은 침실도 없었어요. 화장실이 없는 집도 있었고요. 어떤 곳은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어요. 그냥 우리가 사는 곳이었죠. 하지만 단지 그들이 가난하고 가진 게 없다고 해서 그들의 꿈이 크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그들의 영혼이 풍요롭지 않은 게 아니고요. 당신과 내가 뭐가 다른 가요?"


"이 도시는 사람들에게 큰 꿈을 꾸지 말라고 얘기해요. 더 이상 바라지 말라고요. 아버지는 내 통장잔고와는 관계없이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가고 있다는 것을 심어줬어요. 아버지는 우리가 예술에 많이 노출되도록 하셨어요.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도서관, 박물관, 과학센터를 가셨고 그곳이 우리의 유치원이었죠. 우리는 도시 밖의 삶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책과 그림, 음악 안에 있었어요."


양준일과 슈가맨을 연결시키는 건 무리다. 그저 <슈가맨 3>라는 프로를 통해 찾아낸 한 명의 슈가맨을 통해 원조 슈가맨이 떠오르는 그런 날이다. 단지 지나간 가수를 추억하는 날이 아니라, 한 가수와 음악에 투영된 한 시대를 소환해 다시 생각해보는 그런 날. 환호와 좌절 뒤에 숨겨져 있던 어떤 이들의 삶의 애환 속에 묻어 있는 시대의 지문을 생각해보는 그런 날이다. 



네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될 수밖에 없어. 


양극단에 놓인 이 두 문장 사이처럼 엄청난 먼 거리 사이를 오가는 우리의 삶. 삶에서 대부분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또 실제로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는다해도, 그래서 며칠 사이에 천재 뮤지션과 식당 서빙 노동자의 삶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해도 슈가맨은 그저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간다. 누군가 그 의미를 '서칭'해주지 않는다해도 각자의 삶엔 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두 명의 슈가맨이 말해주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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