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동나동 Jul 18. 2021

인간을 재건하려 했던 과학자

<주기율표>


주기율표에 대한 기억은 두 번째 줄까지


단지 외운 것들은 필요가 사라지면 희미해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수학의 기억은 근의 공식으로, 물리는 F=ma로 남아 있는 것처럼 내게 화학에 대한 기억은 주기율표로 남아 있다. 딱 두 번째 줄까지.


H                                                                           He

Li     Be                         B    C     N    O    F    Ne  

 

왜 저렇게 첫째줄에는 원소 두 개만을 배치했을까? 줄 바꿈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Be와 B 사이의 빈 공간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화학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본적인 것이리라) 기억하지 못한 채 남은 기억은 그저 두 줄. 한때 입시를 위해 공부했다, 다른 암기 과목들처럼 희미한 기억으로 남은 게 고작인 화학이 프리모 레비에게는 파시즘과 맞서는 무기였다.


그는 모든 독단,입증되지 않은 모든 단언과 명령에 혐오를 느낀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그렇다면 그가 우리의 학문에서 새로운 존엄성과 당당함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고,우리를 키우고 있던 화학과 물리학이 우리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자양분뿐만 아니라 그와 내가 찾고 있었던 파시즘의 해독제가 되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했을 리 없다.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많은 과학자들에게 그러하듯, 프리모 레비에게도 과학은 가장 합리적인 언어였다. 끊임없이 인과관계를 설명해 내려는 노력 가운데 부족한 인식을 거듭 갱신해 나가는 과학의 언어에는, 그냥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따라서 이유 없는 복종을 강요하는 파시즘은 그에게 비과학이었다. 그런데 왜 과학적 사고가 가능한 인간이 어떻게 파시즘을 받아들였는가? 왜 인간은 전쟁을, 혐오를, 인종주의를, 우생학을 받아들였는가? 프리모 레비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그에게 과학은 인간을 재건하기 위한 주춧돌과 같은 것이었다.


사물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에게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치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모든 독단, 증명 없는 단언, 유무를 대답할 수 없는 명령에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가?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철(Fe)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에게 늘 따라붙는 수식어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태생의 유대인이자, 화학자, 그리고 작가다. 1919년 7월 31 일 이탈리아 토리노의 자유로운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프리모 레비는 원래 유대인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었다. 1941년 토리노 대학의 화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유대인을 차별하는 파시스트 정부의 인종법 때문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반파시즘 조직인 '정의와 자유'에 가담하여 저항운동을 벌이다 1943년 12월에 체포되었고, 이듬해 2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5년 1월 구소련에 의해 풀려날 때까지 11개월을 수용소에서 보냈다. 다시 유럽 각지를 돌다가 아홉 달이 걸려 고향 토리노로 돌아온다. 이후 도료 공장의 관리자 업무로 생업을 삼으며 수용소의 기억을 꾸준히 글로 발표했다. 주기율표는 197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1987년 4월 11일,자택의 층계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우리 생존자들은 진정한 증인이 아니다. 우리는 눈속임이나 요령 혹은 행운에 의해서 심연의 바닥까지 가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다. (진정한 증인은) 증언하기 위해서 돌아올 수 없다.

프리모 레비 인터뷰 중에서 (아래 링크 참고)


프리모 레비는 '시대의 증언자'라는 수식에 대해 늘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그것도 삶이었다'라고 담담하게 말하려 해도 행간에는 슬픔, 냉소, 무기력과 같은 감정들이 짙게 배어 있다. 아우슈비츠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대부분 평균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그에게는 살아남은 것 자체가 거대한 질문이었을 테니, 평생 과거를 되새기며 '왜'라는 질문을 놓지 않은 것이 삶을 놓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으리라.


저는 제 주위의 세계와 인간들에 대한 기록을 멈춰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해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고 끊임없이 호기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런 호기심마저 없었다면 그의 삶은 좀 더 무기력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시간을 과학자 특유의 실험과 탐구 정신으로 살아갔기 때문에, 그에게는 질문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증언 문학이란 장르로 잘 알려진 여러 작품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과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인 글은 그의 기질과 경험이 뒤섞여 만들어 낸 고뇌의 결과였다.



인간을 재건하려는 시도를 멈추다


전쟁, 학살, 절멸을 가능케 하는 인간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가혹하리만치 철저한 탐구자의 자세를 요구하면서도 인간과 삶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잃지 않았던 프리모 레비. 그조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되는 전쟁에 지쳐 갔다. 특히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에 이르러 그 불안은 크게 증폭되었다. 전쟁과 학살로 고통받았던 자들이 가해자의 자리에 섰을 때, 프리모 레비는 '인간(성)'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유대인이라는 자각이 별로 없었던 그가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생존자로, 증언자로 정체화했을 때, 그 정체성은 오로지 인간을 재건하려는 시도 위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합리화했을 때 그가 가진 정체성이 불러일으키는 절망은 내적 모순을 감당하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피해의 언어를 자리바꿈해 고스란히 가해의 언어로 바꿨을 때 그는 이전보다 더 크게 절망했으리라. 살아 남아 나는 증언하리라. 피해자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이 폭력을 증언하고 드러냄으로써 무력화시키리라. 그런데 그 피해자들이 폭력을 폭력으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면?  



다시 과학의 눈으로 인간을 생각한다


2007년 서경식 선생을 처음 만났다. 전쟁 없는 세상이 주최하는 ‘평화주의자의 행복한 책 읽기’란 행사에서 서경식 선생님이 쓰신 <디아스포라 기행>,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란 책으로 저자와의 대화를 진행했었다. 그때 행사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 얼굴에 새겨진 경계인의 슬픔 같은 것은 잊히지 않는다.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꼬장꼬장함 속에 깊이 눌러 둔 슬픔은 굵은 주름이 되어 드러났다.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얼굴 속에는 체념이 묻어났고 그 체념을 몰아내려는 안간힘이 동시에 느껴졌다. 처음 보는 서경식 선생을 통해 쁘리모 레비의 인상을 상상했었다.


정처 없다는 느낌이 강할 때라 디아스포라, 비국민이란 단어가 내 것 같았고 그래서 책을 읽는 대로 그 언어는 소화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흡수되어 피와 살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삶이 안정을 찾아갈수록 그때의 그 느낌도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 책장에 꽂아 둔 채 잊고 지내던 <주기율표>를 꺼내 읽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소식이 들려올 때였다.  


세계대전도, 파시즘도, 아우슈비츠도 끝났다. 과거의 일이 되었다. 정말 그런가?


이를테면 이런 경우 말이다. 한국의 기업이 해외에서 노동착취를 할 때 그냥 무심코 흘려 넘기지는 않았는가? 그런 심리의 배경에 식민지와 한국전쟁과 독재로 이어지는 고통 끝에 어렵게 이뤄낸 경제성장이 자기 합리화의 근거가 되지는 않았는가? 무기수출로 K-국방을 꿈꾸는 현실은 어떤가?(스톡홀름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무기수출은 2019년 세계 8위) 해외 어딘가에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할 때 쓰이는 한국산 재래식 무기는 어떤가? 우리는 조금 그래도 된다거나, 우리는 고작 이 정도뿐인데 라거나.


합리성의 꼬리표를 달고 은근하게 행사되는 구조적 폭력은 또 어떤가? 산재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도 그 기업의 주식은 계속 올라가고,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에 종속되는 삶이 불평등을 강화하고, 차별의 언어가 자연의 언어를 달고 합리화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충분히 과학적으로 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과학이 아닌 가치의 문제이므로 인간을 재건하는 일은 과학 이외의 언어를 빌려올 때 가능하다는 말은 충분치 않다. 과학적 사고로 갈 때까지 가봐야 한다. 근본적 딜레마는 과학적 입장에서 정해진 인간성(목적)이란 게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 그러니 애초에 재건할 인간성의 원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알면서도 과학의 언어로 최대한 답을 찾아내서 가치를 그 안에 녹여내야 한다. 그래서 적어도 과학의 이름으로 합리화되고 있는 폭력, 불평등, 차별, 전쟁을 과학의 이름으로 배격해야 한다. 끝까지 밀어붙이고 난 후에 무엇이 남는지 알게 될 때까지, 프리모 레비가 과학의 언어로 파시즘에 맞섰던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평화에게 기회를 (Give peace a chanc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