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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동나동 May 02. 2021

평화에게 기회를
(Give peace a chance)

<평화는 처음이라>

평화란 무엇인가?


이 문장에서 평화라는 단어를 다른 추상명사로 대체해보자. 사랑이란 무엇인가? 친절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모든 추상명사는 정해진 답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기준을 세워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수많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뤄진 사회적 합의다. 합의는 그 단어가 통용될 수 있는 범위, 즉 경계를 정한다. 가령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20년 전이라면 몰라도(그때 감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표현이겠지만), 지금은 제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 되었다.


평화라는 단어 역시 그 의미를 두고 경합하는 다양한 노력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저자가 누차 강조하듯, 중요한 질문은 ‘평화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평화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 것이다. <평화는 처음이라>는 이 질문에 대해 수십 년을 고민해 온 저자의 친절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책이다.


‘강력한 힘이 평화의 원천’이라는 관념은 언제나 지배적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평화는 대개 권력자의 언어였다. 공동체 내부에서는 권력관계를 유지하자는 언어였고, 공동체 외부의 적에 맞설 때는 전쟁을 합리화시키는 언어였다. 평화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전쟁이라는 역설은 정치사상사에서도 지배적 관념이었다.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조지 워싱턴)

“전쟁은 다른 수단을 이용하는 정치의 연속” (클라우제비츠)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평화에 대한 오랜 관념에 심대한 균열이 발생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종교적 관점의 평화주의가 존재했지만, 보편적인 정치/사회 이념으로까지 확대되지는 못했다. 평화주의라는 신념은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체계화되었다. 현대 국민국가가 모든 것을 동원하는 총력전 하에 벌어지는 지구적 규모의 전쟁은 그 이전의 전쟁들과 차원이 달랐다. 


무엇이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가?


사람들은 인간성이란 무엇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갈등 또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전쟁을 가능케 하거나 전쟁을 대비하는 일체의 구조에 반기를 드는 일관된 체계로서 평화주의가 등장했다. 따라서 평화(주의)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층위의 질문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내용이 1부 ‘전쟁과 평화에 대한 네 가지 질문’ 속에 담겨 있다. 


전쟁과 폭력은 인간의 본성인가?

강한 군대가 있어야 나라를 지킬 수 있지 않나?

모두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

절대악을 몰아내기 위해 불가피한 전쟁도 있지 않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2부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세 기둥’을 거치며 점점 정교한 형태로 다듬어진다. 책에서 언급한 세 기둥은 다음과 같다. 


전쟁으로 돈을 버는 이들, 군수산업체

전쟁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이들, 안보팔이 정치인

전쟁을 용인하고 묵인하는 보통 사람들


이 책이 가진 최고의 미덕은 전쟁을 가능케 하는 힘과 전쟁을 막는 힘 모두가 우리에게 있다는 통찰을 준다는데 있다. 우리가 전쟁으로 돈을 벌고 권력을 유지하는 기업, 정치인, 군관료를 욕할 때, 자기 자신을 무기력한 관찰자나 피해자의 위치에 두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 선택과 무관하다는 감각이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연대의 수사는 현대 자본주의에 이르러 진정한 의미를 획득했다. 한국에서 수출한 무기가 어딘가에서 전쟁과 진압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확산탄 금지 협약을 두고 “세계 군축 및 인도주의적 의제의 주요 발전이며, 특히 민간인과 어린이들 사이에서 이러한 끔찍한 무기로 인한 광범위한 불안정과 고통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국민연금공단은 확산탄을 제조, 수출하는 한화케미컬과 풍산의 주요 투자자 중 하나다. 전쟁의 양상에 따라 관련 군수산업체 주식이 오르내리고 누군가는 여기에 투자해 돈을 벌 수도 있다. 


<평화는 처음이라>, 98쪽


우리가 할 수 있다!


“나는 전쟁의 책임이 위대한 사람들과 정치가, 자본가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책임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정말 전쟁이 싫었다면 너도나도 들고일어나 혁명을 일으켰어야지요."

-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


우리는 전쟁을 지지, 확대, 유지시키는 힘과 그 반대로 전쟁을 거부, 축소, 종결시키는 힘 모두를 갖고 있다. 따라서 3부 ‘우리의 책임, 우리의 권리’에 이르러, 평화를 가능케 하는 개개인의 역할, 책임, 몫에 대해서까지 한참 생각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단지 지금 한반도에 전쟁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을 넘어선 실천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사람 가운데 사회변화의 방법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꼭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 


상당히 높은 확률로 이 책을 읽는 이들 가운데 평화운동에 호의적이거나 사회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들마저도 종종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전쟁이나 무력저항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여러 사례, 평화주의는 지나친 이상론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현실적 조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프랑코 독재 정권에 맞서 공화정을 지키려 했던 스페인 내전에마저 ‘과연 좋은 전쟁이었나?’는 질문을 던진다. 


프랑스혁명(1789년)에서 파리코뮌(1871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혁명(1917년)을 거쳐 오월 광주(1980년)와 오늘날 미얀마에 이르기까지 부당한 권력에 맞서 왔던 지난한 역사를 떠올려보면 저항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생각 역시 지배적인 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러시아 혁명의 슬로건은 20세기 내내 혁명을 꿈꾸는 수많은 이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했다. 미국과 소련은 공히 2차 세계대전을 ‘착한 전쟁’이라고 불렀다. ‘노동자 자본가 사이에 결코 평화란 없다’는 민중가요는 소위 민주화 시대를 함께 관통했던 노동운동의 숱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평화는 처음이라>, 162쪽


비폭력 저항이란 여전히 경합 중인 논쟁적인 언어다. 평화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비폭력은 단순히 ‘폭력은 나쁘다’는 도덕적 선언을 넘어선다. 저자는 비폭력이란 단어가 좀 더 효과적인 저항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평화에게 기회를 달라고 말한다. 함께 비폭력 저항이라는 방법을 사용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자고. 


<평화는 처음이라>는 귀여운 제목을 달고 나왔고, 저자는 조곤조곤 쉬운 말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지만 결국 이 책은 생산적인 논쟁을 원하는 것 같다. (논쟁이 될수록 책이 잘 팔릴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폭력적인 수단은 평화운동 내부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163쪽)는 저자의 통찰이 더 많은 논쟁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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