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사 다니는 쌍둥이 엄맙니다.
나는 아는 맛을 좋아하고 가던 곳만 가고, 익숙한 사람만 또 만나며 지낸다.
여행은 가면 좋지만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타입은 아니고, 요가와 필라테스를 하지만 그건 '살기 위해' 하는 기본적인 일이다. 일과 육아를 하다가 '아 이것 좀 하고 싶다' 하는 게 책 읽기나 영화(드라마) 보기 정도가 다인 것 같다.
작년에 기획서를 쓰느라 위스키, 그중에서도 싱글몰트 위스키를 배우게 됐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즐거운 입문자로, '마시자'보다는 '맛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어서 찾으면 사고 싶은 브랜드가 있는 수준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새로 뭘 사거나, 먹어보거나, 경험해 보는 것들은 사람들이 그걸 왜 쓰는지 궁금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아 이래서 쓰는 것이군' 나름대로 이유를 알게 된 이후에는 그 해 본 경험이 나에게 남아서 그나마 하는 몇 가지가 되더라. 그러고 보니 나에게 '놀이' 그 자체인 게 없다. 내가 노는 목적으로만 하는 일이 뭐가 있더라?
결혼하고 얼마 안돼서, 친정 식구들과 가족 상담을 한 일이 있다. 그때 성격 유형 검사를 했는데 그게 MBTI였다. 지금이야 F가 뭐고 T가 뭔지 잘 알지만.
당시에는 생소한 결과였고 우린 그 유형을 가졌다는 캐릭터(유명인)를 대입해서 각자의 성격을 풀이했다.
아빠는 트럼프, 엄마는 메르켈 총리, 나는 잔다르크, 동생은 간디였다. (상담은 트럼프와 간디의 냉전 때문이었다)
나는 트럼프가 키운 잔다르크다.
아빠는 일만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 일과 놀이의 경계가 없는 사람‘에 더 가까웠는데 그걸 보고 자란 나는 ’ 일에서 나를 찾는 타입‘으로 일에서 느끼는 성취감과 재미는 중요하지만 막상 쉼에는 그만큼의 에너지를 쏟지 못하는 게 맹점인 사람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바다에 가고 싶다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혼자 좀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있는데
주말과 휴일이면 꼭 전시에 가고, 선선한 가을날이면 잔디밭에 앉아 페스티벌을 즐기고, 1박 2일로도 제주도를 다녀오는 정도의 성실한 취미 생활은 만들지 못했다는 얘기다.
휴가도 남들 갈 때 나도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은 잘 안 해봤는데 아이들이 없을 때는 생각 없으면 안 가면 그만이었지만 엄마가 되니 극성수기에는 꼭 길게 연차를 내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 여름 방학이 8월 첫 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린이집 다닐 때는 경험이 없어서 휴가 계획을 진짜 못 짰다. 휴가 가기 좋은 징검다리 휴일 같은 것도 나중에 알아서 사람들이 다 예약하고 남음 곳에 굳이 비싼 돈을 내고 가야 했다.
쌍둥이 엄마 4년 차가 되니 서울 근교에 ‘아이랑 가기 좋은’ 장소는 웬만큼 알게 됐고. 전국의 ‘수영장 있는 숙소’ 리뷰는 여전히 자주 검색하고 좋으면 가능 여부를 확인하기 전에 우선 예약을 걸어두려고 한다. 아이들이 수영하며 노는 것은 너무 귀여운데다 나도 물속에서는 비교적 덜 지치고 아이들과 같은 텐션으로 놀아 줄 수 있더라.
‘주말 철야로 시작해서 아가들 수족구 확진되며 하루 두 시간 취침한 컨디션으로 보낸 일주일. 일상적으로 골골대는 타입이지만 꼭 이럴 땐 아드레날린 분비하며 독하게 버티는 나란 존재에게 스스로 응원도 하고 좌절도 하며 일과 육아 모두의 전방에 있는 삶이 지속 가능한가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고찰.. 하기 전에 연차가 시작되었다 ‘
이런 내용의 일기를 보면 무엇보다 노는 일정을 성실히 정해둔다는 것은 분명 일상의 리듬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순기능이 있다.
최근에 추석부터 개천절까지 긴 연휴로 아이들과 가을방학 같은 시간을 보냈다.
쌍둥이라 아이들이 집에서 심심해하지는 않는데 또 혼자 있는 시간이 없어서 ‘심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문제였다. 일주일 내내 붙어있던 아이들이 점점 자주 싸우기 시작하더니 자기들도 뭔가 마음이 힘들었는지 소리도 안 내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그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나도 짠한 와중에 웃음이 났다. 너무 귀엽잖아..)
남편과 나는 연휴 마지막날 ‘짝꿍데이’를 도입했다.
엄마, 아빠와 한 명씩 짝을 지어 일대일로 노는 것이다. 놀이공원에 도착한 남편과 나는 아이 한 명씩 손을 잡고 흩어졌다. 아이들은 경쟁하지 않고, 양보해야 할 것도 없으니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집 현관에 도착해서 운동화를 벗는데 남편이 말했다.
- 우리 오늘 1만 2 천보 걸었어
우리는 소파에 앉을 여유도 없이 욕조에 다시 뜨끈한 물을 받고 입욕제를 풀어서 아이들을 씻겼다. 빨리 재우겠다는 의지였다. 미역국에 밥 말아서 밥 한 그릇을 뚝딱한 아이들은 저녁 7시쯤 일찍 잠이 들었다.
남편과 후다닥 저녁 식사를 하고 각자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 뒤에 다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러 방에 들어갔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라이브로 못 볼 오늘의 귀여운 얼굴을 열심히 보는 시간이다. 옆으로 누운 얼굴을 마주보고 아이의
얼굴을 감상하다 그대로 잠 든 적도 있다. 아기 때 얼굴이 점점 사라지고 어린이가 되어간다.
덕질 중에 최고 덕질이 내 새끼 덕질이라고 한다. 버는 돈, 내 시간, 체력, 정신까지 아낌없이 쏟아부어야 유지가 되는.. 육아는 나에게 초호화 취미생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