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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Jun 02. 2024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엄마에게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엇을까. 첫 시작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빠와의 불화, 낯선 도시에서의 외로움으로 늘 힘들어하던 엄마에게 나는 속썩이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늘, 내가 하는 행동이 엄마의 기준에 맞을지를 점검학ㄴ 했다. 중학교때 왕따당했던 이야기를 서른이 다 돼서 우연히 하게 됐을 때 엄마는 왜 한 번도 힘들다고 하지 않았냐며, 너는 어쩜 그러냐고 화들짝 놀랐다. 생각해보면 힘들지 않았을리가 없는데 나는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힘들었었나 실감하지 못했다. 마치 기억이 삭제되어버린 것처럼.


재수에 삼수에 기숙학원을 거쳐 두 언니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전공을 찾아가는 동안 나는 무조건 한 번에 합격해서 엄마의 집을 덜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할 때에도 결혼하게 되면 이 사람이 우리 엄마한테 잘해줄까? 혼자서 상상했었다.


엄마는 지금도 너는 단 한번도 내 속을 썩이지 않았다고 그리고 여전히 엄마에게 가장 착한 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는 모른다. 중학교 3학년 때, 열다섯의 나는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고 동성 친구와 첫 섹스를 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선생들에게 대들다 뺨을 맞기도 하고 걸핏하면 불현듯 학교를 뛰쳐나가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해질 무렵 집으로 갔다. 학교 운동장에서 술을 마시고 불꺼지고 어두운 소각장, 도서관 뒤에서 담배를 피우고 술병을 깨부셨다. 하지만 고 2때 가출을 시도한 둘째 언니와 달리 나는 꼬박꼬박 집에 들어갔다. 두꺼운 문제집을 풀어 제꼈다. 엄마에게 살가운 딸 노릇을 하고 엄마와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그 와중에 미친듯이 공부해서 만들어낸 성적표를 갖다 바쳤다.


그러고도 한참을 나는 착한 아이였다. 선배들이 하는 말에 토달지 않고 쏙쏙 빨아들이는 아이. 아마 그 시절 나에게 북한에 가라고 했어도 나는 네, 하고 갔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지랄맞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나는 언제나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유부단하거나 회색분자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최근에 '네가 좀 유하게 말을 했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살면서 처음 듣는 그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네 말이 옳은 건 알지만 그렇게 해서는 설득할 수 없다는 말에 말할 수 업이 복잡한 마음을 안고 돌아나왔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나는 그 사람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고 나는 옳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부당하다는 말을 어떻게 유하게 하냐고. 유하지 않은 나의 말이 아니라 부당한 그의 행동을 비난해야 하지 않냐고.


착한 사람으로 사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다. 잘 웃고 괜찮다고 말하고 니 말도 맞고 니 말도 맞다고 말해주는 친절함을 보이면 나는 손쉽게 착한 사람이 되어 모두를 불편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남겨두고 온 못다한 말들이 나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이제 나는 그 말들을 등에 지고 간다. 때로는 무겁고 아프고 나를 보는 시선들이 내 등위에서 목을 조르기도 하지만 나는 그 시절 스스로 위로하지 못했던 불화하던 나와 화해하기 위한 길로 지금 걸어가고 있다.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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