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부터 ‘뭐 하나 꾸준히 끝까지 하는 게 없다.’는 말을 많이 들으며 살았다.
지금에서야 관심없는 분야는 쳐다도 보기 싫어하는 나의 성향을 알았다지만,
어릴 때는 그 가시박힌 말이 내 정체성의 전부인줄 알고 살았던 적도 있다.
사실 나는 꽤나 뒷심있는 편이다. 이건 대학생 때 스페인어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 알았고,
뒷심만큼 꾸준함도 있는 편이다. 3년간 같은 다이어리에 정착해서 매년 목표를 세우며 살았고,
3년전에 세운 ‘책 쓰기’라는 목표도 얼마 전 달성해 버킷리스트에서 지웠다.
2012년부터는 태국어를 독학해 결국 통역을 맡기도 했다. 나름대로 얻은 발음의 노하우는 정리해두었다가 수업자료로 활용했다.
글쓰기의 역사도 초등학교 저학년일때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져온 걸 보면, 난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책임감없는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나를 찾아가는 것보다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더 빠르고 믿기 쉬웠던 때에,
계속 나를 부정하는 말들을 들어야했던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주입하는 ‘부정적인 나’를 진짜 모습으로 받아들이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을리가.
지난 날들은 나의 평생이었기에 나를 가스라이팅했던 인물과 상황을 많이 미워했다.
지금의 순화된 표현들로는 말로 다 할 수 없을만큼. 내가 쓰는 언어는 그래서 늘 거칠고 가시박혀 있었다.
모든 나쁜 일은 가스라이팅을 당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정신승리하며 살았다.
그런 나의 모습이 티비 속 범죄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어느 아침에 문득 알았다.
불우한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평범하고 열심히 살아가거나 오히려 뛰어난 생활력으로 멋지게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내 모습은 마치 과거의 누군가를 탓하며 부정으로 얼룩진, 이제 막 반항적인 눈빛으로 잡혀와 교도소에 끌려가는 범죄자와 다르지 않았다.
그 날 아침, 나는 ‘용서’를 했고, 일말의 좌절감도 찌그러진 자존심도 남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용서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다.
가끔, 용서가 가해자들에게 주어진 면피의 기회정도로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속박받았던 긴 세월을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 무마하고자 하는 파렴치한 시도 정도로 알았다.
서른이 넘어 진짜 용서가 뭔지 알게되고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정의하던 내용이 달라졌다.
진짜 용서란, 가해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피해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을 때, 혐오를 부르짖었지만,
지금은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