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소리에서 물소리까지, 삶을 견디게 한 풍경들
오늘의 증상 : 어제 친구들과 치유의 시간을 가진 덕분인지 중간에 한 번 깨기는 했지만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잠. 간헐적 이명 현상 지속 중. 식욕이 거의 없음. 간헐적 현기증도 지속 중
예전에 키크니 작가는 우울증으로 힘들 때
친구들에게 돌아가면서 자신을 '산책시켜 달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산책, 그리고 친구.
모두 너무 사랑스럽고 따뜻한 말이지요.
어제 오랜만에 친구들과 회사 험담을 실컷 하고,
마음껏 공감과 위로를 나눈 덕분인지
밤에는 오랜만에 악몽 없이 꿀잠을 잘 수 있었어요.
오늘은 우울증의 두 번째 묘약, ‘산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집을 고를 때 어떤 기준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나요?
교통? 신축 여부? 아니면 시세 상승 가능성?
저는 투자 안목도 없고, 그런 걸 크게 바라지도 않기에
그저 싸고, 안전하고, 마음 편한 집이면 좋습니다.
서울에서 전세사기로 큰돈을 날린 적이 있어
전세 제도에 대한 신뢰도 없고요.
그런 제가 집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바로 ‘산책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입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광안리 근처였습니다.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는 시간이
우리 가족의 일상이자 작은 유흥이었죠.
성인이 된 후에도 광안리의 반짝이는 야경과 시원한 바닷바람은
지친 마음을 다독이는 최고의 위로였습니다.
직장인 되어 서울로 올라간 후,
제 두 번째 산책로는 보라매공원이 되었습니다.
서울의 무시무시한 교통을 견딜 수 없었던 부산 촌아이는
회사를 걸어 다닐 수 있는 위치에 집을 얻었고,
그 중간에 이 공원이 있었거든요.
그때는 단장이 마무리되기 전이라 지금보다 황량하고
밤에는 살인사건도 있었던 곳이었지만
저는 그 먼지 나는 운동장과 나무 사이를 매일같이 걸었습니다.
울면서 걷기도 하고, 다이어트를 위해 뛰기도 했어요.
지금도 그곳의 나무들 사이에는 제 땀과 눈물이 스며 있겠지요.
하지만 보라매공원을 걸을 때면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어요.
보라매공원에는 광안리의 파도 소리 같은 시원한 물소리가 없었거든요.
5년간의 서울 생활은 전세 사기로 마무리됐고
저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부모님은 시골로 이사 가셨고,
저는 다시 광안리 근처에 월세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회사까지 1시간 반이 걸려도,
퇴근이 밤 10시, 11시가 되어도
광안리를 걸으며 하루를 정리하곤 했어요.
그런 저도 드디어 친구 말로는 절대로 오를리 없다는
작은 아파트를 마련하며
광안리를 떠났습니다.
대신, 온천천이 생겼습니다.
온천천은 금정산에서 시작해 수영강을 따라 바다로 흘러갑니다.
봄이면 벚꽃과 유채꽃이 만개하고, 계절에 따라 초목이 색깔이 바뀌는
부산의 계절 시계이자, 시민들의 운동장이기도 하죠.
제가 어릴 땐 생활하수가 가득하고 모기가 들끓는 곳이었지만,
IMF 이후 공공근로 사업으로 조금씩 정비되며
지금은 부산을 대표하는 생태하천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은 아직 완전히 깨끗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팔뚝만 한 숭어가 헤엄치고,
오리, 왜가리, 이름 모를 철새들까지 찾아옵니다.
운이 좋으면 수달 가족이 고개를 내밀기도 하지요.
그런 날은 산책하던 사람들 모두 환호하기 일쑤랍니다.
물론 광안리의 시원한 파도 소리에는 못 미치지만,
온천천의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도란도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는
요즘 제 마음을 가장 잘 어루만져 주는 소리입니다.
저는 오늘도 온천천을 걷습니다.
이 길이 때로는 숨통이 되어 주고,
어떤 날은 저를 울려 주고,
또 어떤 날은 그냥 조용히 곁에 있어 줍니다.
여러분은 어떤 산책로를 좋아하시나요?
그 길이 어디든, 그저 당신의 마음에 평화를 주는 곳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