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도 사랑할 수 있다면

by 한 나강

바닥에 누워있다. 식사시간만 빼면 총 네 시간째 꿈쩍도 안 하려는 마음을 행위예술로 표현하는 중이다. 싱크대엔 아침부터 두 끼의 설거지가 쌓여있고 그나마 점심은 자두와 두유만 먹어 탑의 높이를 줄였다. 빨래건조대는 블라인드 대용이다. 해도 가리고 얼마나 좋은가 싶다가도 이래도 되나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원래는 책을 반납하러 서관에 가려했다가 아홉 시가 지나고 열 시쯤 되자 동여맸던 마음이 느슨해졌다. 겨우 가라앉은 알레르기가 햇빛에 다시 도질까 봐 몸을 사린다. 그렇다고 이렇게 늘어져있을 필요까진 없지만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게으르고 싶다. 내일은 상담, 모레는 대학병원 일정이 있다는 핑곗거리가 반갑다. 오늘은 아무 데도 안 가련다.


대책없이 퍼질러져있는 대가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죄책감과 수치심까지 막을 방도는 없다. 몸이 편안하면 마음이나마 불편한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게다가 삶이 고단하건 말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이 보기 싫은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은 별로 없었다. 이런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불신은 아마도 자아가 제 모습을 갖추기 전부터 시작되었던 듯하고, 다 자라서는 이를 증명해 줄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 다녔다. 이 덩어리가 꿉꿉하고 찝찝하고 따끔한 것들로 버무려진 터기라는 걸 확인시켜줄 사람들은 도처에 깔려 있었다. 때문에 굳이 그 사실을 알려주는 이들에겐 눈을 흘겨야했고, 결국엔 이 믿음이 맞았다는 절망감이 들 때면 나 자신을 한없이 노려보았다. 그렇게 수십 년을 남탓과 내탓 사이를 오가며 노상 휘청거리는 날들 살아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인간이 배추전 굽듯 방바닥에 들러붙은 지금의 모습이 반가울 리가 있겠는가 하는 얘기다. 심지어 몇 년을 육아로 치열하게 살던 때에도 한시도 떨친 적이 없던 생각이었다. 생판 모르는 남한테는 응원댓글도 달면서 정작 나한테는 격려보다 타박이 운 법이다. 물 흐르듯 편안하게 그 어떤 노력도 더할 필요 없는 자기 비난의 포장도로 깔려있다. 얼마나 긴 시간을 정성스레 닦았는지 아주 맨질맨질해져선 못난 나를 사정없이 미끄러뜨린다.


지금 잘하고 있단 말 한마디에 인색했던 건 하기 싫어서라기보다 이런 불가항력의 힘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감히 거부할 수 없을 만큼의 그 위력이 이제 절정에 다다른 것도 같다. 아이를 웬만큼 키우고 에 혼자 있는 시간이 수록 껏해야 거스러미 같던 생각들도 날카로운 가시들로 변해다. 무턱대고 일을 시작할 만한 경도, 몸도, 정신도 번갈아 안 되고 있간이 상황이 나아져도 딱히 돈을 벌겠단 결심은 서질 않는다. 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더 크다.


나름 어떤 목표를 가지고 집구석을 지키고 있건만 마음은 오늘도 갈라치기를 해 서로 반목과 대립을 일삼는다. 인고 하니 나와 같은 또래인 누구네 누구들은 하루가 시작되면 정해진 시간에 알람이 울리듯 다들 어디론가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이들 중엔 이토록 한가로운 자가 눈에 뵈질 않는다. 아직 결혼을 안 했거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도 직장엘 다니거나 혹은 어지간히 키워놔서 복직을 했거나 하여, 언젠가부터 작은 점처럼 보이던 그들의 뒤통수가 시야에서 아예 사라져버린 지도 꽤 되었다.


안 보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안 보여서 더 불안한 나날들이 있어왔고, 그리 탐낼 만한 무엇도 가진 적 없으면서 텅 비어버린 손바닥만 내려다 보면 두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그래서 아침만 되면 불에 덴 사람처럼 쉼터로, 카페로, 도서관으로, 공원으로, 그 어디로든 튀어나가던 지난날처럼 오랜만에 고장난 몸을 일으켜 집구석에서 나를 어내려 했다. 분명 그러려고 했으나 지금은 마냥 누워 있다. 그 옆에 이 딱서니 마음도 나란히 눕 놓곤 죄스럽고 창피한 은 불에 데어 창밖으로 튀어나가길 기다린다. 제든 쏘겠노라고 시종일관 를 겨눈 시선만 거두면 넙적하게 펼쳐진 이 모습도 그다지 볼품없지는 않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는 는 이제서야 그냥 내가 되어보려 한다.


삶의 어느 시기에는 이런 객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내일이 달라진단 보장이나 의지나 다짐도 없이 이런 나 자신을 당연시 여기는 때. 담보나 계약서 따위도 건너뛰곤 오직 사람 하나만 덜컥 믿어주는 때. 앞으로 잘할 거라서가 아니라 별 이유 없이 그저 나라서 모든 것이 용서되는 런 때.


아침 여섯 시면 데친 채소와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순서대로 나르며 남편의 건강을 염원하던 일을 중단했다. 그 대신 나을 새 없이 다치기를 반복했던 나의 심신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안일이든 바깥일이든 각 잡고 줄세워 봤자 코웃음 한 번에 주르르 쓰러지고 마는 도미노에 불과했다. 애초에 내가 세상에 낳아 놓은 짓들은 언제 그 누구에게서든 '넌 아니다'라는 신호만 떨어지면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스스로가 창조해내는 수많은 일들에 주인의식을 가져본 적도 없다. 단지'정상적인 주부'라는 궤도에 합류하고픈 욕심일 수도 있었고, 미움만은 받지 않겠단 몸부림일 수도 있다. 유야 어쨌든 그간 알맹이도 없이 배를 곯으며 버텨온 것만은 틀림없다.


이것마저 안 하면 ‘나는 뭐 하는 인간인가’라는 생각에 떠밀려 하루를 살아가지 않으련다. 전전긍긍하며 눈치만 보는 어설픈 백수는 이제 됐다. 잘하고 있다. 지금도 충분하다. 더 잘하려고 할 필요 없다. 뭘 잘못 먹은 엄마처럼 한없이 너그러운 마음을 내어본다. 인생의 탄탄대로를 다져야 할 때에 한 평 안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삶을 비하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렬히 존재하는 중이라 말한다.

오후 네 시. 설거지통을 가득 채운 그릇들을 씻어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도 사랑할 수 있다면, 난 뭐든 할 수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