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호두 조각들과 납작하게 쪼그라든 새빨간 크랜베리, 뽀얗게 몸을 오므린 캐슈너트을 먼저 골라 먹는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도서관 휴게실 안. 그나마 웽웽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에 기대어 부스럭 한 번에 와그작 한 번, 견과류 골라먹기에 여념이 없다.
아몬드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몬드가 좋아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몬드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나머지 것들을 청소하듯 집어삼킨다. 남겨진 갈색의 반 줌은 편의점에서 사 온 시원한 라테 한 병과 같이 야금야금 먹힐 터. 원래 입 안 가득 아메리카노와 섞여야 제격이지만 속이 쓰릴 땐 라테와 함께 먹는다. 뜯어진 비닐 팩 속 옹기종기 모인 것들을 바라보며 난 이런 것에 만족하는 인간이구나, 생각한다.
어릴 적에도 그랬다. 진저리나게 맛없는 것들은 언제나 일 순위였다. 병뚜껑 안에 적힌 행사 문구처럼 맛있는 건 늘 '다음에 기회에'. 그렇다고 벌레 먹은 사과나 진물이 샌 귤을 집어 들며 매번 경품에 떨어지는 심정이었던 건 아니다. 매끈하고 탱글탱글한 것들을 아껴두곤 훗날에 맛볼 행복을 미리 당겨 음미하곤 했으니까.
그렇게 꽉 찬 미래의 것들은 그것대로 만족감을 주었지만, 가끔은 아직도 여기에 머물러 있는 내가 입을 삐쭉 내밀게도 만들었다. 오래되어 시든 것부터 해치우는 것이 일생의 버릇으로 자리 잡은 게 어느 날엔 못내 애달프기도 했고.
먹을 것뿐만이 아니라 옷도 희고 빳빳한 새것은 언젠가의 좋은 날로 미루기 일쑤였다. 그러다 철이 지나고 유행까지 지나면 대체 언제 입어보느냐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가만 보니 올여름에 샀던 아이보리색 남방을 여태 한 번 밖에 입어보질 않았다. ‘나중에’ 라며 아끼기만 하다 벌써 가을을 맞을 때가 되어버린 꼴이 우습다.
내 맘에 쏙 들었던 그 남방은 아마도 반질반질 윤이 나는 빨간 사과이자, 샛노랗고 푸르스름하니 막 터질 것 같은 귤, 한 입 깨물면 고소함이 콧등까지 퍼져오는 구운 아몬드였던 가보다. 지금이 아닌 어느 나중에 기분 좋게 걸치고 싶은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텅텅 비어버릴 그때가 견딜 수 없어 아껴두었던 냉장고 속의 보물처럼. 이제 곧 싱싱하고 예쁜 것들로 나를 한껏 채울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곁에 없었던 부모님을 기다리며 언젠가 행복해질 마음을 남겨두었듯이.
여름이 다 가도록 한 번 밖에 입지 못한 아이보리 남방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그날에 대한 대비책이자 초조함에 굴복한 존재를 향한 작은 위로와 격려였을지 모른다.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더운 옷장 속에 몇 달을 하릴없이 매달아 둔 남방이 떠올라도 그리 자책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한 번쯤은 남겨두기만 했던 행복을 단숨에 씹어 삼키려는 욕망에 지고도 싶다.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한눈에 먹음직스러운 걸 알아채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더 망가진 걸 찾으려 혈안이 되어있는 나는, 사실 지금도 행복할 내일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실은 먹고 싶고 입고 싶으면서도 아닌 척, 결국엔 상처 나고 해진 것들을 꽉 움켜쥔다. 그래야 안심이 되고 숨이 쉬어진다. 그러니까 벌레 먹은 사과를 집는다 해서 꼭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강렬한 욕구를 억누르며 살아가고 있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두려움도 비례한다는 걸, 멀리도 아닌 내 안을 들여다보고 실감하곤 한다.
아몬드를 다 먹어치웠다. 아까의 기대와 설렘은 목구멍을 통과하는 순간 무료함으로 변질되고 만다. 지금보다 더 행복할 미래를 위해 아껴두었건만 어차피 그마저도 한 번의 숨처럼 사라지고 마는 일이다. 세상에 영원토록 변치 않는 건 없으니까. 아이보리 남방도 언젠가는 닳고 닳아 헌 옷 수거함에 버려질 운명이다. 그걸 알면서도 여름 내내 옷장에 가둬둔 나의 욕망은 해소되지 못한 채 여적 매달려 있는 처지다. 저 불안과 갈증을 어찌할지... 고작 옷 한 벌로 형태를 드러낸 마음은 주인인 나조차 쉬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멋대로 구겨져 있다.
좀 더 편안할 순 없을까. 모든 게 사라져 버릴 나중을 생각해 매번 겁을 집어먹고 사는 게 아니라. 비싼 옷도 유명 브랜드도 아닌 몇 만 원짜리 남방 한 벌에 집착일랑 그만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단숨에 꿀꺽해 버렸으면. 그렇게 해도 세상 안 무너진다고, 별거 없다고, 그냥 헛웃음칠 수 있었으면. 그래서 머지않은 다음번엔 좋아하는 아몬드를 먼저 입에 잔뜩 넣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