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제 좀 자라서

by 한 나강

어릴 때 키우던 병아리가 있었다. 곧 죽을 것처럼 병약해 보였던 녀석은 한 번씩 아래쪽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려 회색빛의 주름을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리나 등을 툭툭 쳐선 단잠을 깨워댔다. 이대로 못 깨어난다면, 또다시 혼자 남아야 하니까. 나에겐 녀석의 삶보다 나의 삶이 중요했다. 더는 외롭지 않을 날들과 어제보다 오늘을 더 기대할 수 있는 마음, 원할 때는 한껏 기댈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복슬복슬하고 샛노랬던 녀석 습은 어린아이 충분히 그런 희망을 품게 할 만했다.

교문 앞에 늘어선 종이상자 안에는 삐약삐약 소리가 가득했다. 먹이를 찾는 건지 물을 찾는 건지 아니면 제 어미를 찾는 건지. 그것들을 가엾게 여기기보단 어떤 녀석이 제일 오래 내 곁에 머물러줄지를 고르는 게 유일한 관심사였다. 되도록 우렁차게 우는 놈을 골라야지. 눈은 또렷하게 뜨고. 먹이도 잘 먹는 놈이 좋겠다. 날갯짓이 힘차고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는 지도 봐야지. 나에게 병아리를 고르는 일은 다 커서 동반자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심혈을 기울여야 할 일이었다. 물론 그렇게 골라도 후회는 늘 남지만.

우려와는 달리 녀석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뜻하지 않게도 우리 집이 잡식성인 병아리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던 바다. 바퀴벌레부터 지네, 지렁이, 여치, 귀뚜라미, 파리, 모기, 나방 등등 종류도 다양한 곤충 및 벌레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두 칸짜리였던 그 집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려면 시멘트로 처리된 복도에 발을 디뎌야 했다. 그 시멘트 바닥이 곧 부엌이었고, 일자로 뻗은 그곳은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쯤 되었다. 그 양쪽 끝엔 각각 밖으로 통하는 대문과 주인집으로 향하는 나무 미닫이가 있었다. 바로 그 지대가 녀석에겐 최고의 사냥터이자 식사자리였던 셈이다. 가끔 방 안에서 잡아먹기도 했고.

엄마는 녀석이 얼마 안 가 죽을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잠깐 동안 아이에게 충만한 행복을 선사하고 일찌감치 사라졌어야 할 것이 끝끝내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대가리 아래로 튼실한 근육을 자랑하는 게 엄마는 놀랍고도 못마땅했을 것이다. 며칠에 한 번씩 들러 녀석과 마주칠 때마다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저것이 언제 저렇게 자랐느냐고 쇳소리를 내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봄날의 개나리를 연상시키던 녀석은 이제 곧 목화라도 피울 듯 반쯤 허연 깃털을 내보였고, 무엇보다 두 발이 노파의 손등과도 같이 굵어지고 굽어져선 귀여워하기엔 영 징그럽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있어 녀석은 함께 먹고 자고 걸을 수도 있는 이족보행이 가능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외모가 덜 귀여워질수록 언제고 비바람에 쓸려갈 듯 겼던 마음이 조금씩 메워져 갔다. 그때 생각했던 게 이 암울하고 아득한 현실이 정 반대로 이렇게 빛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구나 하는 거였다. 내가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벌레들이 녀석을 살찌우고 더없이 윤이 나게 했으니까.

어느 날 까만 대문을 당겨 열었을 때 저쪽 미닫이에서부터 다다다다 뛰어오던 모습이 여태 생생하다. 석양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던 녀석의 윤곽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성처럼 느껴졌다. 몸 전체를 뒤덮은 반질반질하고 생기 있는 털과 먹잇감을 포착한 듯 날 향했던 또렷한 눈매,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다부졌던 양 날개는 나에게 더없는 신뢰감을 주었다. 너는 나를 떠나지 않을 거지. 영원히 함께일 거지. 그렇게.


녀석은 어느 날 불현듯 사라졌다. 엄마 말론 집에 들어오느라 대문을 열었는데 녀석이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했다. 하필 지나가던 자전거가 그 자그마한 것을 치었고, ‘삐약’이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저 멀리 사라졌다고. 고작 남겨둔 말이 그게 전부였다고. 엄마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녀석의 유언은 영 재밌지가 않았는데, 어쩐지 그 입가엔 미소가 지나간 것도 같았다.

‘삐약!’ 나는 이 소리를 수백 번 되뇌며 녀석을 밟고 지났을 고통과 곳곳에서 터져 나왔을 신음을 상상했다. 그토록 단단했었는데.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단꿈에 부풀어가고 있었는데.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마치 전사와도 같은 부리를 뽐냈던 녀석의 자태가 새삼 환영처럼 다가왔다.

밤새 베갯잇이 젖었던 것도 같다. 어두운 밤 더 어둡도록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떠나가던 순간은 기억에 선명히 남아도, 그 뒤 혼자서 버텨낸 날들은 머릿속에서 조각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아마 허술한 문틈에서 지금처럼 선선한 바람이 들었다면, 집안 어디선가 귀뚜라미 한 마리가 울어주었다면 그나마 위로가 되었을지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이 이야기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 아주 먼 훗날 나의 아이가 동화책 속의 병아리를 보고 귀엽다고 하는 나이가 되고 나서였다. 아무리 빠르기로서니 엄마가 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을 테고, 설사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해도 그 순간 자전거가 지나가 녀석을 칠 확률이 얼마쯤 될까를 따져보았다. 목숨이 끊어지는 찰나에 그저 삐약이라고, 그렇게 성의 없고도 허망하게 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살아는 있었을 거라고, 나를 조금이나마 그리워했을 거라고, 언젠가부터 그렇게 믿기로 했다.

운이 좋아 녀석을 다시 만난다면 그때 미안했다고 말할 참이다. 언제나 위안을 받기만을 바랐지, 내가 너의 가족이 되어준 적이 있었던가 해서. 어미와 떨어진 팔자는 둘이 같은데 나는 뒤늦게라도 가끔씩은 보았으니, 오히려 너를 위로했어야지 않나 어서. 다행히 내가 이제 좀 자라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