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고도 흔한 일

by 한 나강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내가 한 전화를 받지 않고, 꼭 삼십 분쯤 지나 문자로 답을 할 때. 그 내용이 더는 꼬리를 물 수 없게끔 의문 하나 남기지 않은 단답형일 때. 그 까슬까슬한 촉감에 짐짓 놀라지 않은 척하는 마음이 자꾸만 물 먹은 듯 가라앉을 때. 그렇게 어렵사리 돌려보낸 전령이 잘 도착이나 한 건지 아무 기별이 없을 때. 거기서 그치질 않고, 어느 순간 여기 홀로 남겨진 자에게 아무거나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라고 다그치게 될 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이제 뱉어내야 할 때라는 걸.

언제부턴가 그랬었지. 아니, 처음부터일지도 모르겠다. 난 너의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넌 나의 이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도 우린 뱉기보단 삼키길 택했지. 당장에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너무 탐나서. 꿀꺽. 그 한 순간만 잘 넘기면 그리 대단치도 않은 실 하나를 잡을 수가 있었으니까. 그래, 별 것 아닌 실 따위. 그걸 얼기설기 엮어서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더 넓히고 싶었다. 거미처럼. 부지런히 짓다 보면, 어느 날엔 내가 좀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거든. 사실 나는 볼 것도 없는 존재인데, 어쩐지 너를 가지고 또 다른 너를 가지면, 조금이나마 덩치를 부풀릴 수 있었다. 내 착각일진 몰라도. 확실히 그렇더라도. 어디 기대어 쉴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한낱 끊어지는 게 싫었던 걸 수도 있겠다.


내가 겪었던 이별이 죄다 아팠던 건 아니었지만, 때로 어떤 이별은 숨이 잘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산소가 모자라 심장이 헐떡대는 것처럼. 정말로 나는 몇 번의 헤어짐에 왼쪽 가슴이 시큰거리곤 했거든. 숨이 차서 울대가 꿀렁거렸고, 매번 더는 가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했거든. 그러면 비를 쏟아내는 구름처럼 엉엉 울어버리곤 했다. 내가 그래. 나는 헤어지기 싫은 사람과 헤어지는 걸 참 못해.


그런 의미에서 넌 조금 특별하긴 하다. 난 너와 헤어지기 싫거나 헤어질 줄 몰랐던 게 아니었거든. 다만 그때가 지금이란 걸 예측하지 못했을 뿐. 상처받았다면 미안하다. 이제 좀 솔직해질 때도 됐으니까.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흔한 방법으로, 너와 멀어질 기회를 엿보았다. 꽤 오래되었는데 차마 용기가 없었지. 네가 너를 말하기보다 네가 가진 것들을 말하길 즐길 때, 네가 나를 바라보기보다 내가 가진 것들을 가소로이 여길 때. 나는 너를 만나고 싶었지만 자주 그럴 수 없었고, 나 역시 이 문밖을 그렇게 쉽게 나선 적이 없었지. 알다시피 다칠까봐서. 내가 그래. 이렇게 약해빠졌다.


그래도 순간순간 진심을 내보였다. 다치든 말든. 난 한 번씩 네가 좋았거든. 함께 웃을 때도 있었고 울 때도 있었고. 우린 그저 그런 시간들을 나름의 진심들로 채워갔다. 그게 두려움이든 질투든 믿음이든 고마움이든 짜증이든 애증이든 사랑이든 뭐든. 거기에 널 좋아하는 마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오래도록 함께이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너와 나의 늙은 모습을 그려보니 그리 어색하지 않았던 것도 같고.

꽤 오랜 시간을 이어왔다. 실은 곳곳이 터지고 늘어져 종종 우릴 위태롭게 했지만 그마저도 멋스럽다 여기길 택해왔다. 지금 사람들이 옛 궁궐을 찾아가는 이유와도 같이 잘만 버텨내면 나중엔 더 빛이 날 거라 믿고 싶었다. 이제 보니 믿기를 강요한 건지도 모르겠네. 그 조마조마한 순간들이 이마를 짓누르는 날엔 너에게 닿는 실을 확 끊어버릴까도 싶었다. 그때마다 나는 너를 잃기 싫은 마음보다 실을 잡고 싶은 욕망이 더 크다는 걸 알았다.


잔인하지.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너 역시 그럴 거라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곁에 두기로 한 결심이 현실에서 보다 단단한 이름을 입게 될 때, 우리는 모두 속고자 하지만 결코 속을 수 없는 일도 생겨난다. 이를테면 내가 너를 친구라 하거나 둘 사이에 오고 간 것들을 우정이라 굳히는 것. 네가 나를 연인이라 부르거나 우리가 했던 게 사랑이라 여기는 것. 주변인들이 우릴 죽이 잘 맞는 동료로 보거나 마치 가족과도 같은 관계라 믿어지거나 하는 것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것들이 다 빈 쭉정이에 불과해서, 순간 볼품없이 바스러지기도 한다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사람이 오고 가는 일은 삶에서 자연스럽고도 흔한 일이라고. 정말 그럴까. 매순간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매일 잠에 들었다 깨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일까. 아니면 뙤약볕 아래서 흘리는 땀만큼이나 자연스럽고, 한겨울 얇은 창에 서리가 끼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일까. 아무리 속이 비었다 한들 깨어지는 찰나에 하나도 아프지 않을까. 그래서, 정말로 그렇다면, 나는 너를 후 하고 뱉어내고 내일 아침 잊어버리면 되는 건가.


그래, 내가 겪었던 이별이 죄다 아팠던 건 아니었다. 어떤 헤어짐은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일어났고, 너무 흔해 빠져서 기억에서조차 짊어질 것이 없었다. 너라는 사람도 그와 비슷해 언젠가는 쌀 한 톨 정도의 잔상만이 머릿속을 가끔 맴돌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털어낼 수 없는 이 이물감이 꽤나 오래도록 이어질 걸 알아서, 아무래도 평소보다는 더 긴 작별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전혀 자연스럽지도 흔하지도 않은 이별을 맞아, 난 지금 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중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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