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증

by 한 나강

온 하늘을 뒤덮은 구름 파도. 그 아래에서 보다 역동적으로 들이치는 바닷물결은 해안가에 가까울수록 모래빛을 띤다. 해 한 점 없는 이곳에서 쨍한 것이라곤 연신 나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가 전부다. 노트북에 몰입한 어미의 눈치를 보느라 그마저도 사그라들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은 온통 희끄무레한 날의 풍경뿐이다. 런데 아까부터 구름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잿빛의 부스러기가 가뜩이나 탁한 시야 더욱 어지럽힌다. 유리컵에 묻어 있는 이물처럼 날이 맑건 흐리건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들이다. 눈앞에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그 이름 비문증(飛蚊症).


처음 발견한 건 아이를 낳고 몇 년쯤 지난 뒤였다. 어느 날 빈틈없이 새파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다 문득 까만 점 같은 것들이 선을 따라 날아다니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았다 뜨고 연신 비벼봤지만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뚝뚝 흘린 먹물 같은 잔상을 눈 안에 지니고 다니며 차차 보이는 것들을 무시하는 법을 익혀갔다. 그러다가도 어느 때는 유리체를 끄집어 내 깨끗하게 씻어 말리고 싶은 심정이 들곤 한다.


이른 아침 화장실에서 캔버스처럼 새하얀 벽을 마주하거나 너무나도 맑은 날 충 뛰어오른 두 눈으로 끈한 하늘을 누비다가 혹은 한가로운 주말 오후 소파에 늘어져 종이 속의 이야기를 눈에 담으면서도 그랬다. 어느 순간 내가 보려는 것보다 더 짙고 선명한 형체가 약 올리듯 실제의 형상을 가로막곤 했다. 이 세상 단 하나의 망막에만 맺힌 상이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버젓이 눈앞에 두고도 피사체라 부를 수 없게 만드는 내 안의 그림자가 진다. 나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유리체의 부유물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내면의 변성과 혼탁럼 늘 거기 머물러 있다.


이렇고 저런 일들을 겪어내며 남겨진 자국들을 때 벗기듯 쉽게 지워버리진 못한다. 그것들은 나라는 사람을 상징하는 하나의 표식이 되기도 하며, 때로 그런 자신을 벗어날 수 없게끔 하는 낙인이 되기도 한다. 풍경을 풍경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생각의 더께는 살아온 세월만큼 두터워져 있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질 희망을 품기보다는 태초부터 생겨난 몸속의 장기나 사지와도 같이 그저 그런 것이라 받아들여야 하는가 싶다.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내면의 굴곡과 생채기를 말끔히 벗겨버리지도 못한다. 그래서 쩔 수 없이 이토록 얼룩진 마음으로라도 내게 주어진 지금을 온전히 느껴보려 애를 쓴다. 가진 것으로 해내는 것 말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나름의 소신을 담아 에서 윙윙거리는 들을 종이 위에 뇌까린다. 쩌면 나의 글은 처럼 지럽고 번져있으며 뿌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상적이라고 할 만한 그런 사람들이 보고 있을 새파란 하늘이 그립기도 하다. 나보다는 타인의 생각이 옳을 성싶고, 시시때때로 그들의 일상이 부럽기 그지없다. 언제나 나는 꼭 틀린 것만 같다. 고장 난 영혼 때문에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들을 그릴 때마다 내가 이런 것은 다 세상 탓이라는 핑곗거리가 줄을 이어 늘어진다. 그 꼬리가 어디인지도 모르게 길고도 긴 것이 처연하다.


몇 시간 만에 음운이 하늘을 뒤덮었다. 원래부터 하나인 듯 층층이 겹쳐진 먹구름이 아가리를 다물려는 조개처럼 세계를 좁혀온다. 밋밋한 잿빛 구름을 따라 더 어둡고 짙은 무리가 좌로 우로 흘러간다. 의식을 하든 말든 바라보는 곳마다 머무르는 망막 위의 흔적이다. 남들과 같이 저것을 저것으로만 보지 못하는 나라는 사람의 또렷한 관점이다. 날마다 버리고 싶었던 전쟁의 상흔이자 가끔은 나를 차갑게 얼리고 마는 자기 인식의 순간이다.


버릴 수가 없고, 더는 버리지 않는다. 어디서든 나를 나라고 말하는 것이 숨 쉬듯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이 노력은 멈출 수 없다. 나는 틀리지 않았고, 그대와 다를 뿐이다. 단지 이런 생각을 가진 이런 사람일 따름이다. 그대가 선 곳으로 고개 숙일 이유도 나를 변명할 이유도 없다. 내내 골칫거리였던 오점을 지우기를 포기하는 순간 그것은 나에게서 단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작가의 이전글내 나이가 구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