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야문 그녀

by 한 나강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결혼하고 처음 이 동네로 이사했을 적에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던 친구였다. 나는 5층, 그녀는 18층. 담백하고 소박했던 그녀의 집이 지금도 눈에 선히 그려진다.


기다랗고 마른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청포도를 씻어 내놨었다. 다른 친구와 함께 느릿느릿 뜯어먹는 동안 그녀는 우리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초록빛 알들을 먹어치웠다. 시선은 오로지 청포도에만 꽂혀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 얘기를 듣고는 있는 것 같았다. 몸만큼이나 길고 가는 손가락을 놀리며 쉬지 않고 오물오물 씹는 그녀였다. 너무 맛있게 먹고 있어 더는 손대지 않았다.


그녀에겐 그런 순간이 필요한 듯했다.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속 주린 구석을 작게나마 부풀릴 수 있는 한때. 싱그러운 들을 한입 가득 물고는 자긴 항상 마트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장을 본다고 했다. 같은 과일을 몇 시간 차이로 더 싸게 판다며 우리에게 좀 똑똑해지라는 듯 의기양양한 눈빛을 해 보였다. 그 후 청포도만 보면 그녀가 떠올랐다.


늦은 오후,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막 건너려던 참이었다. 바람처럼 옆을 지나는 한 여인이 눈에 들었다. 어두운 분홍 코트 위로 긴 머리칼과 깊게 굴곡진 옆머리가 흩날렸다. 각지고 야윈 어깨는 들숨에 찬 듯 솟아 있었고, 한 손엔 종이와 차키 같은 것들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건너편 어딘가를 바라보며 스키니 진에 둘러싸인 가느다란 다리를 종종거렸다. 그녀라고 짐작할 수 있는 근거들은 차고도 넘쳤지만, 저 커다란 파도를 연상시키는 옆머리는 절대적으로 그녀만의 것이었다.

이름만 두 번쯤 부르다 세 번째는 성까지 넣어 소리쳤다. 부르면 부를수록 그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날숨을 따라 흩어져갔다. 도로를 거의 다 건넜을 즈음 뒤돌아 눈을 맞추더니, 금방 화색이 도는 얼굴로 내게 껑충껑충 뛰어왔다.


마주 보고 웃기를 몇 초쯤 하였을까. 그녀는 내가 어디로 갈지, 뒤에 볼일이 있는지는 묻지도 않고서 흡사 포박을 하듯 팔짱을 꽉 끼었다. 이런저런 근황을 물어가며 나를 목적지로 데려가는 동안 자신은 한 번도 PC방에 가본 적이 없노라고 다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충분히 그럴 만 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그녀는 자신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 남들이 다 하는 자잘한 것들에 관심을 두는 일이 없었다. 지난날 육아에 지쳐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그녀는 열 살 많은 큰언니와 같은 표정으로 엄마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했다. 이 정도면 거뜬해서 셋도 낳겠다더니, 말고 둘을 낳아 씩씩하게 키워냈다.


한 날은 같이 들른 시장에서 감자볶음을 손에 쥐었다 손등을 얻어맞았던 적도 있었다. 직접 해 먹기 힘든 반찬이나 살 것이지 어디 그런 데다 돈을 쓰냐는 거였다. 간단한 건 집에서 만들어 먹으라며 쏘아대던 눈빛이 집에서 게으르게 자빠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운 적도 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좀 얇은 코트이긴 했다. 연신 동동거리며 걸어가던 그녀는 주절주절 자기 사정을 털어놨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프린트해야 하는데, 금방 다녀온 곳엔 웬 남자가 술에 취해 뻗어 있어 무서워 뛰쳐나왔단다. 불러도 듣지 못하고 어딘가에 넋이 나가있던 모습이나 신경 쓰일 정도로 굳어보였던 어깨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 나에게 시간이 되느냐고 묻긴 했다. 묻거나 말거나 그녀를 따라갔을 테지만.


뒤늦게 자격증을 따 수년 째 잘 근무하던 녀석이 왜 갑자기 그만두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손으로 써 온 자기소개서를 타자 속도가 빠른 내가 대신 쳐었다. 그러는 사이 도저히 종이 한 장엔 욱여넣을 수 없는 한 사람의 과거를 엿보기도 했다. 혹시나 그 굳어있는 몸이 다른 무엇 때문인지를 가늠하면서. 타자소리만큼이나 시끄러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것도 아닌 일에 연신 고맙다던 그녀였다.

“그런 일 하는 거 안 부끄러워?”

오래전 그녀가 동네 속옷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동갑내기 남편이 물었단다. 당시 나이가 서른둘이었다. 어째서 남편이 그런 말을 하는지 그녀 역시 짐작은 했을 것이다. 단지 그 말을 던진 자가 단 하나의 내편이 되어줘야 할 사람이라는 게 허물 같은 말에 보다 큰 의미를 부여했을 뿐. 이 독설과도 같은 물음에 그녀는 답했다고 한다.

“내 힘으로 내가 벌어 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당시 이 말을 내게 전하던 그녀는 한 알 한 알 깨물 때마다 톡톡 터지는 청포도처럼 야문 목소리를 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나는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저 짧은 두 문장 안에 그녀의 마음이 꽉꽉 들어차 빈 곳 하나가 없다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지기만 하는 그녀의 음성은 한 번씩 때 아닌 시기에 가슴을 울렸다. 밥을 먹다, 길을 걷다, 노래를 듣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그 어떤 소리보다 선명하게 말을 걸어오곤 했다.


꼭 그때와 같았다. 카페에서 지난 안부를 전하며, 언제나 그랬듯 자신만의 초록빛 목소리를 내었다. 이혼이라는 단어에 담긴 충격과 불안은 진즉에 저 입안에서 알알이 터져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조금은 달라진 그녀의 인생은 이제 막 새로운 곳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중이었다. 생전 처음 서보는 낯선 길 위에서 걱정과 염려는 있을지언정 주눅이라곤 들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자기 자신에게도 수없이 했을 말이란 걸 설핏 넘겨다볼 수 있었다. 상황이 바뀌어도, 변함없는 그녀 자신이 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예기치 않은 때에 쓸데없이 단단하던 내 것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곤 하던 그녀였다. 잠시 잊었던 사이 또 객쩍은 걱정을 했었나 보다. 헤어질 즈음 더는 그녀가 추워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그 뒷모습을 응원하겠노라 마음으로만 전했다. 한 알 한 알 깨물 때마다 톡톡 터지는, 초록빛 야문 그녀가 멀어져 갔다.